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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75 ] 아시아 선교, 인도와 일본

by 세포네 2005.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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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와 일본 선교 역사의 첫 장을 연 것은 위대한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의해서 였다. 사진은 1549년 하비에르가 첫발을 디딘 일본 나가사키항.

 

 

위대한 선교사 하비에르 등장

인도와 일본 선교 역사의 첫 장을 연 것은 위대한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에 의해서였다. 교황사절이자 포르투갈 왕 요한 3세로부터 위임을 받아 해외선교에 나선 그는 1542년 인도 고아에 가서 말라카에서 성공적으로 포교 사업을 펼쳤고(1545~1547) 1549년에 새로 발견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교회의 초석을 놓았다. 그는 이어 중국으로 가던 도중 세상을 떠났다.
인도는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1460~1514)가 1498년 캘리컷에 도착함으로써 유럽과 처음 접하게 됐고 이후 포르투갈은 인도의 향료 무역을 독점했다. 그 후 포르투갈은 인도를 군사적으로 정복하고 상업지를 건설했다. 158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점령된 이후에는 스페인 역시 인도에 진출했다. 정복자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국가적 차원에서 선교활동을 적극 후원했다.
인도 선교
인도에서 원래 선교활동의 선구자는 1518년에 가장 먼저 고아에 수도원을 설립한 작은 형제회였다. 하지만 선교 활동이 본격적으로 성과를 얻기 시작한 것은 하비에르의 도착 이후였다. 그는 고아에 도착한 뒤 남부 지방의 언어인 타밀어로 교리 문답서를 만들고 주로 낮은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봉사와 헌신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선교 활동을 왕성하게 펼쳐나갔다.
한편 도미니코회는 1548년 인도에 도착했다. 도미니코회는 코친과 고아에 수도원을 세우고 1600년에는 고아 인근에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는 대학을 설립했다. 1572년에는 아우구스티노회가 진출해 고아에 대규모 수도원을 세웠고 동부 벵골 지방의 무슬림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했으며 아우구스티노 수녀회는 1606년 고아에 산타 모니카 수녀원을 설립했다.
인도에서 교계제도의 발전은 매우 더디게 이뤄졌다. 초대 주교인 후안이 고아에 도착한 것이 1538년으로 고아는 1558년에 코친과 말라카를 포함하는 대교구가 됐다. 교회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자선소를 전국 25개 지역에 설립하고 교리교사를 양성하는 등 선교 활동을 확대했다. 1572년경 인도에는 약 28만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에서 이처럼 선교가 성과를 거둔 것은 인도의 생활 양식과 사고 방식에 적응하는 적응주의적인 선교 정책에서 요인을 찾을 수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원인 로베르토 데 노빌리(1577~1656)는 마두라에 파견돼 산스크리트어와 타밀어를 배워서 힌두인들에게 익숙한 언어로 설교하고 인도의 고행자들처럼 금욕적인 생활을 솔선수범하면서 유럽인들을 멀리하고 힌두인처럼 살아가려 했다. 새로 개종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인도 종교의 관습을 직접적으로 이교적이 아닌 한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전례와 신자 공동체 생활에서도 인도 종교의 관습을 차용하는 등 모든 종교 문제에 대해 관용적으로 대했다.
하지만 이러한 선교 방식은 곧 교황청의 제재를 받았다. 17세기말 이에 대한 논쟁이 시작됐고 1744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에 의해 단죄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인도에서 기반을 잃었다.
일본 선교
인도에서 선교 활동의 기반을 구축하고 일본으로 떠난 하비에르는 1549년 8월 15일 고아에서 입교한 한 일본인의 안내를 받아 가고시마에 입국했다. 일본에서는 이때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는 물론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을 포르투갈의 발음을 따라 「기리시탄」이라고 불렀다. 이 기리시탄의 교회사는 이후 1858년 개항장에서 거류 외국인들의 그리스도교 신앙 활동이 인정될 때까지 300년간에 걸친 일본 교회사를 일컫는 말이 된다.
하비에르는 2년 반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히라도, 교토, 야마구찌, 후나이 등 주로 규우슈우와 혼슈우 서부 지역의 선교 활동에 힘썼다. 초창기 불교적인 문화와 전통에 젖은 일본인들은 하비에르 일행을 인도에서 온 천축승으로 알았고 하비에르 역시 불교적인 용어를 사용해 일본인들에게 교리를 설명했다. 특히 그는 서양의 새로운 자연 과학을 일본에 전달해 그들의 호감을 얻었고 큰 영향을 주었다. 선교사들에 의해 전달된 유럽의 새로운 문물은 전란에 시달리던 일본 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700여명의 일본인들에게 세례를 주고 중국으로 떠난 하비에르의 뒤를 이어 토레스 신부가 적응주의 노선과 포르투갈 상선의 일본 출입을 선교활동과 연계지으며 선교 활동에 나섰다. 그는 18년 동안 약 3만여명에게 세례를 주고 전국에 40여개의 교회를 세웠다. 또 병원, 육아원, 양로원 등을 운영하면서 서민 대중들에게 접근했다.
그 뒤를 이어 카브랄 신부는 1570년 성직자 회의를 개최해 일본 선교 방침을 확정짓는 한편 오다 노부나가와 각지의 기리시탄 다이묘의 후원으로 교세를 크게 늘려나갔다. 이후 1580년경 일본에는 신자 수가 약 10만명 정도까지 늘어났다.
오다 노부나가는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고 불교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기리시탄을 지원했고 1556년 후나이에 처음으로 병원이 세워지는 등 의료 사업이 확장되면서 구호를 받은 가난한 서민층에서 많은 입교자가 생겨났다.
1579년 예수회의 동양 순찰사 발리냐노(1538~1606)의 입국은 일본 선교의 또 다른 전기를 가져왔다. 1580년 나가사키를 예수회의 근거지로 삼고 일본인에 대한 편견으로 물의를 빚던 카브랄 신부를 출국시킨 뒤 일본의 사정을 고려한 선교 지침서를 저술해 교세를 크게 신장시켰다. 또 인도 관구에 속했던 일본교회를 대목구로 승격시키고 포교 체제를 정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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