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74] 갈릴레오 갈릴레이

by 세포네 2005. 11. 8.
728x90

◀ 갈릴레이는 자신의 연구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결코 가톨릭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신앙과 과학의 대표적 갈등 불러

1992년 10월 31일 교황청 과학원 회의에 참석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고통스러운 오해와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될 가톨릭 교회와 과학 사이의 비극적인 상호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선언했다.
신앙과 과학 사이에 벌어졌던 역사적 분쟁의 종지부를 찍은 이 선언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로 유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사건을 두고 한 것이다.
359년 만에 이뤄진 위대한 과학자 갈릴레이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편견과 선입견, 편협한 교조주의가 일궈낸 부끄러운 교회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 회부돼 지동설 포기를 수락한 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며 100년이 지난 뒤 작가가 지어낸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비록 자신이 한 말은 아닐지라도 그 말은 그의 심정을 너무나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갈릴레이와 관련된 일화는 많다. 유명한 것은 피사의 사탑에서 행한 실험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탑은 대리석으로 된 8층의 종탑으로 1173년에 시작해 1350년에 완성됐다. 탑을 세우는 동안에 지반이 내려 앉아 이처럼 기울어졌고 그래서 탑의 무게를 층마다 올라갈수록 달라지도록 궁리를 하면서 공사를 했다고 한다.
갈릴레이는 이 사탑에서 무게가 다른 물체는 서로 다른 속도로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발표했다. 흥미로운 실험을 보리라는 기대로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이 실험은 나무공과 쇠공을 탑 위에서 동시에 떨어뜨려 어느 공이 먼저 떨어지는가를 보려는 것이었다.
2층에서 6층까지 각 층마다 나무공과 쇠공을 동시에 떨어뜨렸다. 두 개의 공은 동시에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렇게 각 층마다 5번의 낙하 실험이 진행됐고 실험은 끝났다. 구경꾼들은 뭔가 재미난 것을 보리라고 기대했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흩어졌다. 역사적인 대실험이 끝났지만 찬사를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로 실험적.경험적 과학 방법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갈릴레이는 이탈리아 피사(Pisa)에서 태어나 피렌체 인근의 수도원에서 시와 음악, 미술과 기술 등의 교육을 받았다.
18세 때인 1581년 피사대학 의학부에 입학해 의학을 공부했으나 수학과 물리학에 더 흥미를 느꼈고 기하학에 심취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의학 공부를 포기한 그는 피렌체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하면서 1586년 발표한 논문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1589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모교인 피사 대학에서 수학 강사가 되는데 여기서 그는 유명한 피사의 사탑 낙하실험을 했다. 하지만 진보적인 사고를 가졌던 그는 취임 2년 만에 보수적인 사람들과 사이가 벌어져 사임하게 된다.
1592년 북이탈리아 파도바(Pado va) 대학교의 수학교수로 취임한 그는 이곳에서 18년 동안 재직하면서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고 수많은 학생들이 문하로 들어왔다. 그는 이곳에서 자유로운 연구활동을 하면서 천문학, 수학, 물리학 등 광범위한 연구를 했고 건축이나 토목, 성의 건축에 도 빼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1609년에는 그는 네덜란드에서 개발된 망원경을 개량해 32배율의 망원경을 제작했으며 이를 사용해 처음으로 천체 관측에 나섰다. 이로써 그는 달 표면이 고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고 목성의 위성들을 관측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일찍부터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믿고 있었는데, 자신의 천체 관측 활동을 통해 이러한 지동설을 더욱 확신하게 됐다. 1610년 자신의 천체 관측 결과를 「별들의 사자(The Starry Messenger)」라는 제목으로 출간하면서 이는 철학자들과 천문학자들의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다.
1613년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지지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명백히 하면서 갈릴레이는 격렬한 반대를 받게 된다. 피사 대학 학장인 델치와 철학자 콜롬베를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은 성서를 근거로 그의 지동설을 반박했다. 갈릴레이는 이에 대해 성서가 절대적 진리임은 분명하지만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논박했다.
교황청은 1616년 교령을 반포해 코페르니쿠스의 「천체 궤도 운행에 관하여」를 금서 처분하고 그의 이론을 주장하거나 전파하는 것을 금지했다.
갈릴레이는 그후 피렌체 인근에서 은거하며 연구에 몰두하다가 1624년 로마에 가서 교황으로부터 교령을 해제하는 대신 편파적 토론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에 대한 연구를 허락받았다.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1632년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비교한 「두 주요 우주관에 대한 대화」를 발표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했다.
결국 그는 이로 인해 종교재판에 회부됐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다는 선서를 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바로 그때 그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1633년 금서 처분됐다가 1822년 해제됐다.
갈릴레이는 그 후에도 1642년 1월 8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피렌체 교외의 자택에서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연구를 계속했고 근대역학의 출발점이 된 「두 개의 신(新) 과학에 관한 대화」를 완성해 1638년 네덜란드에서 비밀리에 출간했다.
1636년 시력을 잃은 후에도 죽는 날까지 연구를 계속했고 자신의 연구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결코 가톨릭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그였지만 교회는 그의 장례식까지 간섭해 조사 낭독도 금하고 갈릴레이 일가의 가족묘지에 매장하는 것도 허락지 않았으며 비석까지도 세우지 못하도록 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