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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101

[40] 오토 1세와 신성로마제국 아헨대성당 내에 있는 오토 3세의 무덤. 신성로마제국의 상징인 독수리상앞에 잠들어 있는 오토 3세는 오토 1세의 손자로 3살에 왕위에 올라 고대 로마제국의 부흥을 꿈꾸었다. 황제가 국가와 교회 모두 통치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출발지였던 비텐베르그를 거쳐 온 탓인지 신성로마제국의 심장부인 아헨을 들렀을 때 8월의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주체할 수 없는 오한에 떨었다. 제국의 통일과 안정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고 강력한 세속 권력을 바탕으로 성직까지 마음대로 임명하고 파면했던 제국의 역사가 이미 600년 뒤 비텐베르그의 성난 함성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역사의 회한이 밀려온 탓인지 모른다. 동프랑크 왕국의 발전 프랑크왕국은 루드비히 1세 이후 삼분되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로 발전했다. 오늘날.. 2005. 7. 21.
[39] 카롤링거 왕조의 멸망과 교회의 혼란 J. P 로렌스작 교황 포르모소와 스테파노 6세. 무덤에서 파낸 포르모소 교황의 이 사체재판은 9세기 극심했던 교회 혼란상을 보여주고 있다.  교황권, 권력의 노리개로 전락 896년 가을,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다. 스테파노 6세 교황이 땅에 묻힌지 9개월이나 지난 포르모소 교황의 시신을 파내 교황복을 입힌 후 단죄하는 사체재판을 거행한 것이다. 나아가 스테파노 6세 교황은 교황 반지를 낀 포르모소의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 사체를 절단해 티베르 강에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만행에 격분한 로마시민들은 스테파노 6세 교황을 체포해 옥에 가둔 뒤 교살시켜 버렸다. 이 같이 참담했던 교회의 혼란상은 카롤링거 왕조의 몰락에서부터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개혁 초기까지 계속됐는데 사가들은 이 시기를 .. 2005. 7. 21.
[38] 성화상 논쟁과 제2차 니체아공의회 흠숭과 공경 구별로 논쟁 해결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으므로 우상숭배를 초래하는 신상을 만들지 않는 유대 율법의 영향을 받았다. 자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성상을 만들어 세우는 것에 부정적이었고 물고기나 배와 같이 신자여부를 확인하는 암호나 간단한 상징물 혹은 신앙교육을 위해 착한 목자, 어린 양과 같은 소박한 그림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비를 표현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를 얻은 4세기 이후 영세자들이 늘어나자 모든 이들에게 상징적인 표현만으로 신앙신비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졌다. 보다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표현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던 시절이었으므로 이런 표현들은 예술적 시각에서 보다 교육의 도구로 이해됐고 교부들은 설교를 진리를 얻어 듣는 도구로, 성화상은 보는 도구로 강.. 2005. 7. 21.
[37] 교황령의 성립과 기원 교황령은 교황의 세속주권이 인정되는 교황국가의 영토를 말한다. 자연 교황령은 교황의 권위에 따라 시대마다 달랐지만 언제부터 시작됐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 교황국가의 성립은 베드로 세습령(patrimonia petri)이라고 부르는 교회 소유의 토지와 더불어 황제들의 교회내정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교황들의 노력. 여기에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랑고바르드 족의 침입이라는 국제정세, 로마 전통적 귀족세력의 몰락과 무관계층의 지위향상 및 이탈리아내의 반 비잔틴 경향 등의 사회적 요인이 중요 요소로 작용했다. 이중에서도 가장 기본적 토대는 역시 교회가 일찍부터 소유해 온 많은 토지재산인 베드로 세습지였다. 161년에 고린토의 디오니시우스 주교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로마교회의 신자들이 다른 지역의 교회.. 2005. 7. 21.
[36] 카알대제와 그리스도교적 황제권의 완성 유럽사회 발전의 기초 다져 수백마디 설명보다 하나의 상징이 더욱 명확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것이 100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독일의 아헨대성당. 피핀의 아들이자 그리스도교적 황제권을 완성한 카알대제가 786년부터 짓기 시작해 800년에 축성된 성당이다. 생애의 대부분을 말 위에서 보내며 대제국을 이룩했던 카알대제의 왕궁성당인 아헨대성당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자신의 통치이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부활을 상징하는 8각형 구조에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성당을 따른 황제식 원형 천장. 여기에 제대 맞은편 서쪽 정면에 위치한 자신의 옥좌는 맞은 편 예수님의 이콘과 마주보고 있다. 세상구원을 위해 동쪽에서는 예수님이 서쪽에서는 황제가 온다는 의미라고.. 2005. 7. 21.
[35]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의 제휴 753년 11월 교황 스테파노 2세가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로마를 나서고 있었다. 랑고바르드족의 로마 침략 위협에 맞서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 왕국으로 피핀 3세와 협상하러 떠난 길이었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 여행을 '비잔틴 제국으로부터의 교황직 이탈, 교황사에 있어서 동로마제국 시대로부터 프랑크 민족 시대로의 이행(移行)을 상징한 것이다'라고 평했다. 제휴의 배경과 과정 5세기 이후 서유럽이 게르만족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됐지만 로마제국의 합법적 정부이자 교회의 수호자는 여전히 비잔틴, 동로마제국이었다. 그러나 동로마제국 역시 유스티아누스 황제 시절 반달족과 동고트족을 몰아내는 등 옛 영광을 어느정도 회복하는 듯했으나 곧이어 페르시아, 아바르족, 슬라브족 등 많은 이민족들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무.. 2005. 7. 16.
[34] 이슬람의 출현 "오 마리아!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아들의 기쁜 소식을 네게 주시노라. 아기의 이름은 마리아의 아들 예수이리니 이 세상과 다음에 오는 세상 그리고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자들로부터 영광되리라" 성서의 한 구절을 연상시키는 듯한 이 말은 꾸란(코란) 3, 46의 내용이다. 이처럼 이슬람은 우리의 생각보다 그리스도교와 가깝다. 마리아의 이름도 복음서에는 19번밖에 나오지 않는데 반해 꾸란에는 34번이나 언급된다. 철저히 일신교를 주장하는 이슬람은 유다교를 하느님의 노여움을 산 자들의 길, 그리스도교를 길을 잃고 헤매는 자들의 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세운 순수한 유일신 신앙을 유다교는 계시 내용을 수정했고 그리스도교는 예수와 그 제자들은 진정한 모슬렘이었으나 후대에 변질된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2005. 7. 16.
[33] 아일랜드, 영국의 포교 골롬바노가 세운 이오나수도원 유적. 563년경 아일랜드의 수도자인 골롬바노는 스코틀랜드 서쪽해안의 이오나수도원을 설립했는데 이 수도원은 7세기까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선교 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했다  유럽 복음화에 큰 영향 미쳐 영국교회의 중심은 런던이 아니라 대륙과 인접한 남쪽 끝인 켄터베리 대교구다. 이는 그레고리오 1세 교황에 의해 선교사로 파견된 로마 성안드레아 수도원장 아우구스티노가 자신의 대주교좌를 런던이 아닌 이곳에 세움으로써 비롯됐다. 지금도 켄터베리 대성당에는 아우구스티노 자리가 있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브리타니아) 지방으로 구분되는 영국 제도의 선교가 교회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 지역의 복음화가 유럽의 그리스도교화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스코.. 2005. 7. 16.
[32] 프랑크족의 개종 서유럽의 주인이 게르만족으로 바뀌면서 로마인과 게르만인 사이의 대립이 심화됐다. 이는 종교적 대립으로 더욱 확대됐는데 게르만족은 아직 이교도였던 프랑크족을 제외하곤 대부분 아리우스 신앙을 신봉하고 있었다. 게르만족의 아리우스화는 아리우스파의 주교인 울필라스(Ulfilas 311~383 )의 선교활동에 의해 이뤄졌다. 그리스도교 신자이자 로마인인 어머니와 이교도인 고오트족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울필라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체류하면서 신앙을 아리우스 형식으로 받아들였고 아리우스파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에우세비오에 의해 주교로 서품돼 고오트 지방의 선교를 위해 보내졌다. 이리하여 아리우스 신앙은 고오트인들에게서 시작하여 모든 게르만 민족들에게 전파돼 국교화 되다시피 했다. 게르만족들의 국가.. 2005. 7. 16.
[31]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교회사 무대 북유럽으로 확장 독일 여행의 백미라고 하는 라인강 여행이 시작되는 쾰른은 식민지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콜로니아가 독일어화한 말로 로마제국의 최북단 방어도시였다. 로마제국의 국경은 국가체제를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만든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이후 라인강과 다뉴브강을 기점으로 하고 있었고 제국의 주력부대를 이곳에 수비군단으로 남겨 놓았다. 용맹한 게르만 민족의 남진을 제지하는 것이 로마제국의 가장 주된 국경 수비였던 것이다. 라인강과 다뉴브강을 경계로 로마와 마주한 게르만족은 마을공동체로 살았으며 그들의 가장 큰 정치적 사회적 단위는 부족이었다. 또한 사회체제에서의 기본적 관계는 전사와 부족장과의 관계였는데 이는 이후 유럽전체를 게르만족이 지배하게 되면서 봉건제도를 이루는 바탕이 된다. 로마가 .. 2005. 7. 16.
[30] 비잔틴 교회 국가에 종속된 교회 모습 보여 황제는 신이 뽑은 지상의 대리자로 인식 '하느님은 ~이 아니다’는 부정신학 발전 교회가 걸어온 지난 흔적들을 찾아다니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소아시아라 불리는 아나톨리아 지방이었다. 로마제국의 주무대였으며 이전에 이집트의 가장 위대했던 파라오 람세스 2세와 자웅을 겨룬 히타이트의 땅. 뿐만 아니라 바울로 사도 전도여행지의 주무대로 그리스도교 신앙전파의 관문역할을 해냈던 곳. 콘스탄티노플 천도 이후 1차부터 8차까지의 공의회가 열려 그리스도교 교리가 체계화되고 다듬어진 곳이다. 이처럼 1000년 동안 동로마 제국의 중심지로 찬란한 그리스도교 문명을 꽃피웠던 신앙의 땅이면서도 터어키하면 신앙과의 연관성이 빨리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마도 터어키의 역사적 상황과 맞물려 있기 때.. 2005. 7. 11.
[29] 로마와 동방교회의 수위권 문제 콘스탄티노플은 새로운 로마를 자처하며 로마교회와 동등한 품위를 주장했다.   사도전승에 기인 로마교회의 우위성 지속 훗날 “명예 대표”…재치권은 불인정 마찰 지금은 유럽의 주도권이 서방에 있지만 고대에는 서방과는 비교도 안될 경제력을 바탕으로 동방이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을 주도했다. 특히 콘스탄티노플 천도 이후에는 더욱 그 비중이 높아졌다. 교회의 발전도 이런 역사적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있었다. 서방교회의 상징이랄 수 있는 베드로 대성당이 1626년에야 축성된 데 반해 동방의 소피아대성당은 537년에 축성된 것을 보아도 동방지역의 풍요로움과 문화적 수준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런 와중에서도 서방교회가 동방교회에 우위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로마교회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로마교회의 우위성은 사도.. 2005.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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