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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67] 칼빈의 개혁 운동

by 세포네 2005.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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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랑드르의 판화. 칼빈주의자들이 가톨릭 교회의 성상을 부수는 모습.

 

 

“사도시대의 순수로 돌아가자”

만년설의 알프스, 아름다운 호숫가 도시,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리고 그 속에서 세상 어떤 불화와도 어울리지 않을 듯한 여유 있는 사람들…. 스위스를 거론할 때면 떠올리는 모습들이다.


하지만 그런 전형적인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스위스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제네바이다. 지리적으로는 스위스에서 삐죽 얼굴을 내밀고 프랑스령 내에 파묻혀 있는 형상, 그래서인지 불어가 통용되고 전체적인 도시 분위기도 프랑스 문화의 흔적을 안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누가 뭐라해도 이곳은 연중으로 전세계의 굵직한 외교적 활동들이 이뤄지는 곳이고 16세기에는 루터 이후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칼빈이 활동함으로써 스위스의 종교개혁운동에 중심이 됐던 지역이다.

 

교회와 갈등

 

칼빈은 1509년 프랑스 느와용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곳 주교좌 성당 참사회의 재산관리인을 지냈던 아버지는 모종의 불화로 인해 참사회, 주교와 소송을 하게 됐고 1531년 파문된 채 세상을 떠났다. 같은 무렵 보좌 신부였던 그의 형도 교회와 틈이 벌어지고 병자성사조차 받지 않은 채 죽음을 맞았다.


1523년 파리로 건너간 그는 1528년까지 신학을 공부한 뒤 오를레앙과 부르쥬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527년경부터 성직과 신앙에 회의를 갖기 시작한 그는 1531년 부친이 사망하자 파리로 돌아와 인문주의 연구에 몰두했다.


1533년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안을 잡았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하면서 칼빈은 이른바 「돌연한 개종」의 시기를 맞는다. 교회를 초창기 사도 시대의 순수성으로 복귀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탄 그는 급기야 가톨릭과 결별하고 프로테스탄트가 된다.


1534년과 1535년 사이의 겨울에 그는 슈트라스부르크를 거쳐 바젤에 이르고 거기에서 그뤼네우스, 뮈코니우스 부쩌, 카피토 등을 만나 본격적인 개혁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그는 저 유명한 「그리스도교 요강(Institutio religionionis Christianae )」을 작성해 처음에는 익명으로 다음해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바젤에서 출판한다. 이 저서는 박해받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를 변호하는 저술이었는데 그 후 여러 차례 수정 보완되면서 그의 신학사상의 근본적인 면모를 담고 있다. 이 저술에서 그는 참된 교회는 하느님 말씀의 순수한 설교요 성사의 올바른 관리이므로 기성 교회의 가시적인 모습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완전한 결별

그가 슈트라스부르크로 돌아가기 위해 잠시 제네바에 들렀을 때 그는 빌헬름 파렐(1489~1565)을 만나고 그의 청을 받아들여 제네바에 머물게 된다. 인구 1만3000명의 도시 제네바의 시민들은 자치권을 얻기 위해 이웃 도시 베른의 프로테스탄트들의 도움을 받아 투쟁하고 있었다.


칼빈은 로마서 주해와 설교를 통해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시 참사회에 「신정 정치」 사상에 바탕을 둔 엄격한 개혁안을 담은 규정을 제출하는 등 가톨릭 세력의 반발을 샀다.
결국 1538년 그는 파렐과 함께 추방돼 슈트라스부르크로 돌아가 신학교에서 강의를 맡고 부쩌(Martin Butzer, 1491~1551) 등과 친교를 맺으면서 종교개혁가로 성장했다. 그는 당시 슈트라스부르크를 대표해 프랑크푸르트, 하게나우, 보름스, 레겐스부르크 등의 종교 토론회에 참석했고 독일의 종교 개혁가들과도 만났다.


1541년 칼빈은 자신의 신봉자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게 됨에 따라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에 앞서 그는 제네바를 가톨릭 안에 머물도록 요구했던 사도레토 추기경과 논쟁을 벌였다. 1539년 저술한 「추기경 사도레토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그는 가톨릭과 완전히 결별하고 교회, 의화, 성사에 관한 자신의 고유한 사상을 결정적으로 피력했다.

 

개혁의 중심

 

제네바로 돌아온 그는 그 후 14년 동안 「신정 정치」를 철저하게 구현하려 했다. 이로부터 이상적인 신앙적 도시 국가를 향한 그의 여정이 시작됐다.


교회와 세속의 법규는 긴밀하게 조립됐고 제네바 시민들의 사생활은 물론 오락과 여흥까지도 법률로 금지되고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 조직은 마음대로 시민들의 사생활을 파악하고 품행을 감독했다. 교회의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시의회에 넘겨 속권의 처벌을 받게 했다. 과도한 엄격성으로 빚어진 자유주의자들의 반발은 첫 5년 동안 무려 56건의 사형선고와 78건의 추방 등 혹독한 진압으로 굴복됐다.

 


신국 형성

 


그리하여 1555년까지 엄격하게 조직된 「신국(神國)」이 형성됐고 제네바는 새로 개혁된 교회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1559년에 설립된 신학교는 곧 비텐베르크를 능가해 수많은 설교가와 교사들의 양성소가 됐고 이들은 칼빈의 교회 제도와 신학설을 전 유럽에 보급시켰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제네바에는 인근 지방으로부터 많은 피난민들이 유입되기도 했다.


칼빈은 빼어난 이론가이며 체계적인 조직가, 능수능란한 정치적 수완을 겸비한 교육자로서 모든 개혁가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가였다. 그는 신학적 통찰력과 주석학적 재능을 바탕으로 성서에 관한 주석들 뿐만 아니라 개혁과 예정에 관한 많은 논문들을 집필함으로써 그의 사상과 이념은 제네바를 중심으로 프랑스는 물론 네덜란드, 영국, 스코틀랜드, 독일의 라인강 지방으로 전파됐다. 특히 그의 사상을 지지하는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은 위그노로 불리며 가톨릭과의 충돌로 위그노 전쟁을 일으켜 낭트 칙령을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어내기도 했다


말년에 이르러 중병에 시달리면서도 칼빈은 설교를 계속하면서 교회 국가의 지도적 위치를 유지하다가 1564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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