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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101

[64] 보름스 제국의회 1521년 4월 루터는 황제 앞에 소환되어 자신의 신앙과 행동을 변호해야만 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해 하루의 말미를 얻은 루터는 4월 19일 의회에서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취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루터, 끝까지 ‘취소 불가’ 주장1521년 1월 3일 파문된 루터는 이후 다시 한 번 자신의 주장을 취소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알 5세(1519~1556)는 1월 27일부터 보름스(Worms)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루터의 국외 추방령을 선포하려 했으나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루터 문제를 의회에서 심사하도록 요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다.의회로부터 출두령을 받은 루터는 4월 16일 보름스에 도착해 다음날 황제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생각할 시간을 .. 2005. 10. 29.
[63] 라이프치히 토론회 1520년 12월 10일 루터는 수많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회법 책과 교황교서를 불태워버렸다. 이듬해 1월 3일 마침내 가톨릭교회는 그를 파문했다. 사진은 루터홀 안뜰.   루터, 근본 교리까지 거부거듭된 교황청의 파문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루터는 1520년 12월 10일 가톨릭교회와 결정적으로 결별을 선언하게 된다. 이날 루터는 수많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회법 책과 교황교서를 불태워버림으로써 이듬해 1월 3일 마침내 가톨릭교회는 그를 파문했다.이에 앞서 1520년 6월 루터는 라이프치히에서 당시 저명한 신학자였던 에크와 토론회를 갖게 된다. 이 토론회에서는 주로 교황의 수위권 문제와 공의회의 권위 문제가 주된 쟁점으로 다뤄졌다.에크(Johann Eck, 1486~1.. 2005. 10. 29.
[62] 대사 논쟁과 루터 대사용 고해성사표 판매가톨릭교회에 대해 가장 자주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이른바 「면죄부」이다. 이 용어는 사실은 「대사(indulgence)」를 지칭한다. 16세기초 독일에서 촉발된 대사 논쟁은 소위 종교개혁을 부른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루터를 중심으로 한 대사 논쟁을 통해 역사가 주는 성찰과 반성의 권유를 다시 한 번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논쟁의 발단루터 종교개혁의 직접적 동기는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위한 대사 설교에 있었다. 극도로 과장된 대사 설교를 통해 특히 당시 독일 교회는 부의 축적에 몰두한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1513년 제후 요아킴 1세의 동생 알브레히트는 23세 나이에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가 됐고 할베르슈타트의 관리권도 얻게 됐다. 마인츠.. 2005. 10. 29.
[61] 루터의 ‘탑실 경험’ “신앙을 통해서만 구원” 확신 독일 작센안할트 주에 위치한 공업도시인 비텐베르크.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탑실에서 독일의 신학자이며 종교 개혁자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이른바 「탑실 경험(Turmerlebnis)」이라고 불리는 신앙 체험을 한다. 그는 이 체험 속에서 인간은 결국 죄와 욕망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지상에서 선행을 쌓고 공로를 세움으로써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게 된다고 확신을 하게 된다. 바오로 사도의 『의인은 신앙으로 살게 된다』는 로마서 4장 17절의 말씀에서 루터는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불안과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됐고 스스로 양심의 평화를 누리게 됐다고 할 수 있다. 루터가 수도원 안에 살.. 2005. 10. 29.
[60] 인문주의와 에라스무스 순수한 복음정신 회복 주창위선과 미신.교계제도 폐해.형식주의 배격“분열통한 개혁보다 용서.쇄신으로 정화를”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중세기의 유럽은 지금의 유럽연합(EU) 보다 더욱 강력하게 통합된 하나의 사회였다. 지금의 유럽연합이 경제, 즉 돈을 매개로 한 경제 공동체에 불과한 반면 당시 유럽은 신앙을 매개로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통합을 이루고 있던 단일체였다.그러나 중세 말기에 이르러 교황권의 추락 등과 함께 민족국가들의 군락으로 변모돼 있었고 이러한 민족국가의 형성은 자연 교회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며 이른바 민족적이고 영토적인 개념의 국교회 사상을 등장시켰다. 어느 곳의 통치자들도 교황의 간섭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국내 교회에 관한 일일지라도. 콘스탄츠 공의회 이후 영국, 독일, 프랑.. 2005. 10. 29.
[59]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 세속 권위에 몰두 교권 추락사생아를 추기경이나 영주로 임명공명심 탓에 문예진흥에는 이바지중세 예술의 대표적 양식을 고딕(Gothic)이라 부른다. 이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중세문화를 비하하기 위해 붙인 말로 야만적인 고트족의 작품이란 뜻을 품고 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중세를 5세기 로마제국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르네상스 이전까지의 야만시대로 규정하고 근대의 시초를 고대의 연장선상에서 찾고자 한다. 이 같은 사고는 개인보다는 교회와 신중심적인 문화였던 것에 대한 반동으로 14~15세기 부패한 교회상에서 기인하는바 크다.르네상스의 시작르네상스(Renaissance)는 재생, 부활 등의 뜻을 지닌 프랑스어로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부흥을 통한 새로운 문화 창출 운동으로 사상 문학 미술 건축 등 다.. 2005. 10. 29.
[58] 바젤 공의회 스위스 바젤 대성당. 바젤에서 강력히 주장된 공의회 우위설은 교황들로 하여금 공의회를 기피하게 만들어 16세기 종교개혁시 적시에 공의회를 개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작은 사진은 마지막 대립 교황을 선출한 뮈켈 하우스.    공의회 우위설 맞서 교황권 회복공의회 개최 기피…개혁 시기 놓치기도교회일치 원칙 “의식은 자유롭게” 제시스위스 북부의 바젤. 프랑스와 독일 국경이 접하는 곳이다. 스위스 제2의 도시이기도 한 바젤의 주교좌 성당을 찾았을 때 성당 앞 광장에서 축제가 한창이었다. 주교좌 대성당 완공 500주년 기념 축제였다. 그러나 이 축제에 참가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1529년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측에 성당을 빼앗겨 지금은 예배당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대성당 맞은 편 광장 오.. 2005. 10. 29.
[57] 위클리프와 요한 후스 콘스탄츠의 후스 하우스.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한 기간동안 후스가 머물렀다는 집에 그의 기념관이 세워져 후스의 행적과 주장을 기리고 있다.    교회 부패하자 교계제도 거부성직자 특권 향유.백성 착취로 원성 자자국가교회주의 부추겨 훗날 종교개혁 준비국민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지배계급은 엄청난 부와 특권을 누리면서도 더 큰 이권을 위해 갈라져 싸우고 그러면서도 국민들에게는 인내와 순종을 요구한다면 국민들은 당연히 지배층의 지배논리와 전통을 거부하고 항거할 것이다.15세기의 교회가 그랬다. 교회 기강은 해이할 대로 해이했으며 서구 대이교로 지도층은 서로 반목했으며 위로 받아야 할 양떼들을 돌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반교회적 사상이 발생하고 퍼져갈 온상이 됐다. 더욱이 근대국가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는 시기로.. 2005. 10. 29.
[56] 콘스탄츠 공의회 마르티노 5세 교황을 선출한 공의회 건물(왼쪽). 그러나 콘스탄츠 공의회는 성 마리아 대성당에서 개최됐다   교황권에 실망 공의회 우위설 대두단일 교황 선출로 40년 분열 종식성직자 쇄신등 개혁조치도 내놓아40년간 교회의 여정이 분열과 반목으로 점철되어 한계에 다달았다. 그 해결책으로 마련된 공의회 개최지 콘스탄츠를 찾아갈 때는 독일지역을 취재하며 하루에도 수백㎞를 달려야 하는 일정과 더위 속에서, 그것도 혼자라는 노독이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전날 보덴호수(Bodensee)에 이르러 멀리 반대편 불빛으로만 보이는 콘스탄츠를 바라보며 맥주 한잔으로 노독을 달래는 동안, 부침을 거듭해온 교회 역사에 오랫동안 생활의 주기를 맞춰온 탓인지 교회가 콘스탄츠에서 새로운 힘.. 2005. 10. 29.
[55] 서구 대이교 대립 교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사에서 새로운 교황을 선출했으나 오히려 교황이 세 명이 되는 초유의 사태를 발생시켰다. 사진은 피사의 대성당. 종탑으로 세워진 유명한 피사의 사탑이 보인다.   교회 분열로 교황이 3명 존재현 교황은 몇 대일까? 현 교황청 연감에는 현 교황을 264대로 표기하고 있지만 비오 12세때까지는 비오 12세를 262대로 표기했다. 그러면 현재는 266대가 되어야 한다. 이 같은 혼란은 대립 교황으로 인한 것이었다. 역사적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 교황은 비오 12세에 이어 교황에 선출되자 자신의 이름을 요한 23세라고 명명했다. 이는 과거 1410년부터 1415년까지 재위한 대립 교황 요한 23세를 역사적 오류에 의한 합법적 교황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한 .. 2005. 10. 29.
[54] 아비뇽의 교황들 아비뇽 교황들의 지나친 친프랑스적 정책들은 영국과 독일의 불만을 샀고 마침내 영국 국교회와 독일에서의 종교개혁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사진은 아비뇽의 교황청 전경.   교황, 70년간 로마를 떠나있었다교황권은 약화되고 프랑스 왕권은 강화교황직의 보편성 타격…불안 위기 조성아비뇽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끊어진 채 남아있는 '성 베네제 다리'다. 성 베네제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1185년에 세웠다고 하는 이 다리는 이후 론 강이 범람하여 끊어진 이후 복구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아비뇽의 끊어진 다리가 주는 상징성은 묘한 역사적 여운을 남겨 주었다. 교황청이 로마가 아닌 아비뇽으로 옮겨지게 된 것은 이탈리아 내 교황령의 사회정세 불안과 강력해진 프랑스 왕권의 강요에 따른 것이었다. .. 2005. 10. 29.
[53] 교황권의 쇠퇴와 교서 ‘우남상탐’ 파리의 노틀담 대성당. 필립4세가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공의회 소집에 맞서 프랑스 최초의 삼부회의를 개최한 곳이다.  그리스도교적 서구사회 해체성직자 투옥.십일조 부과로 교황과 갈등왕권 강화로 교황권의 우위성 쇠퇴 기미유럽의 오래된 도시 이름을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보인다. 독일에서는 000부르그(-burg) 영국에서는 000버러(-bourg) 프랑스에서는 000부르(-bourough)라는 도시이름 뒤에 붙는 접미사다. 이는 중세 도시들을 부르는 말로 성읍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그 도시민들을 부르주아라고 불렀는데 시민이라는 뜻으로 통용됐다.상공업을 통한 도시의 부활과 발전은 엄청난 사회적 변혁을 가져왔다. 도시의 발달과 함께 화폐경제가 급성장했는데 이는 토지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부의 형태를 바.. 2005.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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