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76] 한국교회 창립

by 세포네 2005. 11. 8.
728x90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신앙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구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은 지난 1984년 한국을 방문, 축하의 말을 전했다.

 

 

‘이 땅에 빛을’

『여러분의 사랑하는 나라에 그리스도 신앙이 들어온 200주년 맞이를 기쁨과 고마움으로 경축하면서, 여러분은 하느님 은총으로 「이 땅에 빛을」 가져오기로 결의했습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한국교회 창설 200주년 전국 사목회의 개회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교회가 창설된지 200주년을 맞은 지난 1984년 한국을 방문하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평신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신앙을 찾아 나섰던 한국 교회에 경축의 인사를 했다. 「이 땅에 빛을」이라는 주제로 열린 200주년 기념행사들은 한반도에 복음의 빛을 비추게 한 하느님의 섭리와 선조들의 뜨거운 믿음을 기리는 뜻 깊은 자리들이었다.
실로 한국교회의 성립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웃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이고 아시아 어느 나라에서도 복음의 선포는 서구로부터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일단의 평신도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열정을 통해 전해진 한국 교회의 역사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섭리요 기적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조선땅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오게 된 것은 나름대로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요인들이 있음을 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여러 사학자들은 한국교회 창립이 지니고 있는 구세사적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결코 기적으로서만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역사적 필연성을 갖고 있었음을 설명한다.
역사적 필연성도 제기
우선 당시 지리상의 발견과 이에 따른 서구 사회의 전세계 탐험 여행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을 초래했고 이로써 선교사들이 중국과 일본 등 이웃 나라들에 발을 디딜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예수회는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원인 세스페데스 신부를 조선 남해안에 파견해 일본인 천주교 병사들을 돌보게 했는데 그는 아마도 조선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교를 전하려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 중에서 천주교에 입교한 이들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도 선교사들은 북경에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의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서양 문물을 접한 사신들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망으로 선교사들을 찾았고 선교사들은 서양 문물을 이들에게 전해주었다.
이처럼 조선 사신들을 통해 서양 문물이 처음으로 조선에 도입됐지만 중국으로부터의 선교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중국 선교사들이 한자로 저술한 교리서 등 천주교 관련 서적들은 17세기 초엽부터 계속 조선에 전해졌다.
천주교 서적들은 처음부터 신앙의 차원에서 읽혀진 것은 아니다. 당시 남인 학자들은 이 서적들을 탐구함으로써 실학 운동에 자극을 주는 동시에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낳게 했다. 이미 이수광, 유몽인, 이익 등에서 학문적인 관심을 바탕으로 이뤄졌던 천주교는 이내 홍유한, 권철신, 정약전, 이벽 등에 이르러서는 주요한 인생의 문제를 서학서에서 찾고자 하는 시도를 하게 됐고 이어 기도와 재계 등으로 천주교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한국 천주교가 성립되는 두 번째 배경을 엿볼 수 있다. 18세기 후반은 급속한 사회 변동이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당시 주류를 이루던 성리학에 대한 본격적인 반성이 일어나 실학이 등장했고 사회 변화의 과정에서 신분 제도가 무너졌다.
여기에 심각한 기근과 전염병 등 자연재해를 겪고 정치 문란으로 인한 탐관오리의 횡행 등으로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새로운 가치 체계에 대한 희구가 지식인들을 포함한 사회 전반에 깃들었다.
1784년 이승훈 영세
한국교회는 마침내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와 이벽, 정약전 등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꾸림으로써 태동하게 된다.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간 이승훈은 처음부터 천주교를 관심사로 품고 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훈이 동지사편에 북경으로 간다는 소식을 들은 이벽은 그에게 반드시 선교사를 찾아 만나고 영세를 청한 뒤 성서와 성물을 갖고 돌아와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이에 따라 이승훈은 북경 북당의 그라몽 신부를 만나 필요한 교리를 배우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한 뒤 돌아왔다.
이승훈은 귀국 후 북경에서 가져온 성서와 성물을 바탕으로 이벽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고 이벽, 권일신, 김범우 등 가까운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다. 이로써 세례를 받은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가 탄생했던 것이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혹독한 박해의 시기를 거치게 된다. 조상 제사 문제에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와 그 박해 시기를 거치면서도 깊이 뿌리를 내리는 순교의 역사가 바로 한국교회사이다.
그리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신앙 수용과 순교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의 성장을 이루게 됐고 이제는 아시아 선교, 특별히 초기교회 복음을 받아들였던 중국 교회에까지 복음을 선포하는 명실상부한 세계교회의 일원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