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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73] 중국 선교와 적응 논쟁

by 세포네 2005.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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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주의의 근시안적인 승리는 아시아 선교지의 사멸을 의미했다. 오늘날 보편교회는 중국 선교를 가장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사진은 중국 교회의 모습들.

 

 

서양 학문 기술 문물 앞세워 선교
예수회 “제사는 민속”…신자수 27만까지
교황청 ‘적응주의’ 단죄로 선교지는 사멸

인류 구원의 보편적 성사인 가톨릭 교회가 고유의 전통 종교와 문화를 지닌 동양인에게 어떻게 선포돼야 하는지는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세계 선교의 새로운 과제가 주어진 이래 지금까지도 여전히 큰 과제로 남아 있다.
마태오 리치(1552~1610)가 적응주의를 채택하고 놀라운 성공을 거뒀던 중국의 선교는 비극적인 운명을 겪었다.
이탈리아의 예수회 회원으로 천문학자요 수학자였던 리치는 1585년 미켈레 루이지에리(1542~1607)와 함께 중국 남부지방에 도착해 중국 정부의 허락 하에서 중국 진출에 성공했고 1599년에는 난징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1601년 황제 만력제 신종(1572~1620)의 허가를 받아 북경에 입성했다.
그는 처음부터 적응주의에 따른 선교 방법을 채택했다. 그리스도교가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외래적 요소를 극소화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고 처음부터 중국인의 사고 방식과 생활 양식에 적응하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의 적응 방식을 채택했다.
서양의 학문과 기술, 문물을 이용해 중국 지도층의 서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수용하려는 중국 지배층의 학자들과 교분을 가질 수 있었고 그들의 관할 지역에서 선교의 허가를 받아내고 나아가서 그들을 입교시킬 수 있었다. 리치의 사망 당시 중국 지도층에서만 2000여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역시 예수회원인 아담 샬(1592~ 1666)은 고관의 자리에 오르고 북경에 공공연하게 성당을 세웠으며 전국적인 종교 자유를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사망했을 때 중국에는 거의 27만여명의 그리스도교 신자가 있었다.
그러나 리치의 이러한 선교 방법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하나는 신학 용어 문제로 하느님에 대한 중국어 명칭이었다. 즉 경서에 나오는 「상제(上帝)」 혹은 「천(天)」을 교회가 채택할 수 있는가의 물음이었다. 이에 대해 리치는 「천주(天主)」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상제(上帝)와 천(天)도 경서 본래의 의미는 하느님을 지칭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배공제조(拜孔祭祖), 즉 공자를 공경하고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문제에 대해 리치는 이를 종교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 민속으로 규정하고 중국 가톨릭 신자는 이런 의식을 집전하거나 참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수도회의 편협한 대립
이런 문제들은 중국 교회에서는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그런데 서구 국가들의 정치적 경쟁과 선교 수도회들의 편협한 대립은 의례를 둘러싼 문제들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면서 결국은 이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야기했다.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의 선교사들은 리치의 적응주의적 태도를 지나친 것으로 간주하고 리치와 예수회원들을 교황청에 고발했다. 1643년 도미니코회의 선교사 모랄레스(1597~1664)는 17개항으로 작성된 질문서를 교황청에 제출했고 1645년 교황 인노첸시우스 10세는 예수회의 중국 의례 내용을 잠정적으로 금지했다.
예수회는 1651년 마르티노 마르티니(1614~1661)를 로마에 파견해 자신들의 선교 정책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역설했고 1656년 교황청은 알렉산더 7세의 인가를 얻어 선교사들에게 광범위한 관면권을 부여하는 결정을 내렸다. 도미니코회는 다시 1645년의 결정이 1656년의 결정에 의해 효력이 상실하는지 질의했고 교황청은 이에 대해 두 교령이 모두 사안에 따라서 적용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중국 현지에서는 예수회,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대표들이 모여 1656년의 교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는데 이후 파리외방전교회가 예수회의 선교 자세를 반대하고 나서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1693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샤를르 매그로 주교가 자신의 관할 지역 신부들에게 일체의 배공제조 의식과 상제, 천의 용어 사용을 금지시키고 교황청에 특사 파견을 요청했다.
1701년 교황청에서는 신학자들이 양측의 주장을 검토한 뒤 예수회의 선교 방법을 단죄하고 하느님을 상제와 천으로 부르는 것을 금지해 오직 천주만을 인정했으며 배공제조와 위패 안치도 금지시켰다.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중국 의례 논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교황 특사로 샤를르 매아르드 드 투르농을 중국에 파견했고 1704년 적응주의의 금지를 다시 확인했다.
이에 대해 중국 황제 강희제는 교황특사의 자세와 거동에 불만을 표시하고 매그로 주교를 추방했으며 리치의 선교 정책을 따르지 않는 외국 선교사들에게 중국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황제는 투르논 이후 파견된 교황사절 메자바르바에게 이렇게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당신은 당신의 종교를 파괴했습니다. 당신은 이곳에 사는 유럽인들을 비참하게 했습니다. 벌써 죽은 오랜 사람들의 훌륭한 이름을 당신은 더럽혔습니다』
1715년 교황은 다시 교령을 반포해서 1704년의 금지를 재확인했고 1742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도 재차 교서를 통해 모든 적응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금지령을 반포했다.
이 유럽주의의 근시안적인 승리는 아시아 선교지의 사멸을 의미했다. 이어 중국에서는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오랜 박해가 시작됐다. 중국 선교의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비오 11세와 비오 19세가 마침내 중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중국 의례 금지령을 철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새로 공산화된 중국에서는 구전통과 의례가 하등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중국 공산화와 함께 선교지로서 중국 땅에는 그리스도교의 엄청난 비극이 발생했고 지금에 와서야 중국 선교는 보편교회의 오늘날 가장 간절한 염원의 대상으로 남아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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