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72] 지리적 발견과 식민지 포교

by 세포네 2005. 10. 29.
728x90

◀ 지리상의 발견에 따른 식민 정책과 강제적 개종은 원주민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착취자와 압제자의 종교로 보이게 했다. 사진은 달리의 작품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교회, 원주민 강제 개종시켜

지난 2000년 대희년 3월 1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하느님 백성인 교회 구성원들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용서를 청하는 예식을 거행했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교회의 커다란 과오 중의 하나로 중세 종교 재판에서 이교도들에 대한 박해, 십자군 전쟁과 함께 「폭력을 동원한 원주민들의 강제 개종」에 대해 「진리의 이름으로 행한 폭력」이라고 고백했다.

 

불순한 동기의 선교

 

17세기 지리상의 발견과 함께 시작된 서구 열강의 영토 점령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동기 외에도 자주 잘못을 드러낸 종교적인 열정에도 크게 기인했다. 가장 난폭한 「정복자」들까지도 정복된 민족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것을 본래의 의무로 느꼈다.


물론 교회는 자신의 주님으로부터 선교의 사명을 명백히 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폭력을 동반하고 정치, 경제, 군사적인 불순한 동기와 함께 뒤섞임으로써 교회의 역사 안에서 부끄러운 오점의 기록을 남기게 된 것이다.
지리적 발견이 시작되기 바로 전, 16세기 종교개혁은 서구 교회가 빈곤해지고 축소되어가는 과정에서 만난 최후의 일격이었다. 대부분의 북부 지방을 잃어버린 후 가톨릭교회는 동남부 유럽에 국한됐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오랫동안 유럽에서 그리스도교 최후의 보루가 됐다.


바로 이때 위대한 지리상의 발견 시대에 있어서 세계 선교의 새로운 과제가 교회에 주어졌다. 15세기 중엽 이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남쪽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1486년에 희망봉에 도달했다.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 아프리카를 돌아 항해를 계속해 인도에 도달했다. 1500년 카브랄은 브라질을 발견했고 도처에 식민지가 생겨났다. 마젤란은 1519~1522년에 걸쳐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를 성공했고 1516년 포르투갈의 상인들은 중국에, 1542~1543년에는 일본에도 발을 디뎠다.


스페인 역시 포르투갈 못지 않게 성공을 거둬 특히 제노바 출신의 콜럼버스는 1492년 이래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그는 우선 중미 군도의 섬들을 발견한 후 자신이 인도에 도착한 것으로 믿어 그것을 서인도로 불렀다. 코르테스(Hernan Cortes)는 1519~1521년에 멕시코에 도착했고 1520년에는 칠레, 1525년에는 아르헨티나, 그리고 1532년에는 페루가 발견되고 정복됐다.

 

민족과 문화 무시

 

이러한 모든 지리상의 발견에서 종교 문제는 중요한 동기였다. 식민 정책과 강제적 개종은 원주민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착취자와 압제자의 종교로 보이게 했다. 그들은 정복과 동시에 이교를 그 지역에서 근절시키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강제로 이식하는 것을 명예로 여겼다. 정복자들은 늘 선교사들을 대동했고 항상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선교 정책은 선교지 자체에 축복을 주지 못했고 그리스도교가 현지의 민족과 문화와 유기적인 융합에 이르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선교는 식민지 지배가 확고하고 현지 종교가 큰 내적 저항을 보이지 않는 중미와 남미 지방에서만 원할하게 이뤄졌다. 인도, 중국, 일본 등 오랜 문화와 전통을 지닌 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가 그 기반을 확고히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선교 활동에 대해 신학자와 선교사들은 상반된 견해를 보였다.


세풀베다(Juan Gines de Sepulveda, 1490~1573)는 식민지 지배를 일종의 의무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스페인의 도미니코회 선교사였던 라스 카사스(Bartolom de Las Casas, 1474~1566)는 이러한 생각에 반대해 수십 년간 인디언의 인간다운 취급과 평화적인 선교 방법의 도입을 위해 싸웠다. 스페인 출신의 도미니코회 선교사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 1492~1549)는 라스 카사스보다 더 명확하게 식민지화의 문제점을 제기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선교에 있어서 모든 이교도들은 죄의 상태에 있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길에서도 벗어나 있다는 것이 당시의 대체적인 사고 방식이었다. 교회는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의 논리를 전개했다고 볼 수는 없다.

 

노예매매 범죄 규정

 

하지만 그런 중에도 교황 비오 2세(1458~1464)는 1462년에 노예 매매를 중대한 범죄로 규정했고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는 1537년에 발표한 서한에서 신세계의 식민지 확장으로 위협 당하고 있는 원주민의 존엄성을 옹호했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의 움직임들은 실효를 거두기 어려운 것이 당시의 정치, 경제적 상황이었다.


오늘날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외래 종교로 간주되고 있다. 인도나 파키스탄 등 일부 국가에서는 걸핏하면 자국민들에 대한 강제 개종 혐의가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씌워지기 일쑤이다. 이런 자세는 식민지배와 강제 개종 시도가 동일시됐던, 뿌리깊은 역사적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1960년대 이후 제기된 신식민주의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면서 『교회는 기아, 질병, 문맹, 빈곤, 국제간의 부정, 과거 정치적 식민주의의 잔혹과 같은 경제적 문화적 신식민주의 등에 의해 생명의 극한적 상황에로 강요당하는』(교황권고 「현대의 복음선교」) 많은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선언했다.


가톨릭 교회가 가진 자, 권력자의 종교일 때 복음의 선포를 가장한 강제와 억압이 나타날 수 있다. 오늘 우리 교회는 과연 어디에 서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직도 비그리스도교인들은 야만인들이며 하위의 사람들이고 구원의 길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라는 완고한 오해가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하지는 않는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728x90
반응형

'[교회와 영성] > 세계교회100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74] 갈릴레오 갈릴레이  (0) 2005.11.08
[73] 중국 선교와 적응 논쟁  (0) 2005.11.08
[71] 반종교 개혁  (0) 2005.10.29
[70] 공의회 이후 성인시대  (0) 2005.10.29
[69] 트리엔트 공의회  (0) 2005.10.2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