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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순교터에 피어난 신앙, 강화 성당

by 세포네 2007. 6. 3.

▲1961년 강화 성당 영세식 - 2대 모토마 신부님과 함께
▲그리스도 왕 의원(上), 구호물자 배급(下)

 

순교터에 피어난 신앙, 강화 성당

강화는 갑곶성지, 진무영성지, 황사영 생가 터 등 순교지로 잘 알려져 있다. 그중 성지로 개발되지는 못했지만 최인서, 장치성 등이 순교한 진무영 순교터는 강화성당에서 불과 100m 거리에 있다.

예로부터 해로(海路)를 통해 타지인들의 왕래가 잦았던 강화지역에는 비교적 일찍 복음이 전래되었다. 병인박해 얼마 후 1871년 이 아가다의 전입으로 신앙이 시작되었고 이 아가다의 딸 김부엉 루시아는 1918년 드뇌 신부의 중매로 영종도에 사는 안 베드로와 혼인하여 강화읍 대산리 3번지에서 본격적으로 전교를 시작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후 흉년이 겹쳐 가톨릭 구제회에서는 전국적으로 밀가루, 보리가루 등을 배급하였으나 강화에는 혜택이 없었다. 신자들이 나서서 적극 요청하여 양곡 지원이 이루어졌고, 1956년까지 수차례에 걸린 양곡 배급은 많은 신자수의 증가를 가져왔다. 

 

이렇게 오랜 전교활동과 구호물자 배급으로 신자수가 증가하자 1957년 김포본당 강화공소로 설립되었고 이듬해인 1958년에 강화성당으로 승격되어 신자들의 오랜 숙원을 이루었다.

1962년 3대 주임 패트슨 신부는 섬 주민들이 의료시설을 이용하는데 어려움이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1963년 병원 설립을 인가받아 메리놀 수녀회 수녀를 초청하여 ‘그리스도 왕 의원’을 설립하였고, 4대 주임 브랜스필드 신부는 ‘그리스도 왕 농장’을 만들어 돼지 신품종을 도입, 공소 및 가정에 배분하여 극빈 가정의 생계를 마련해 주었다.

강화성당 마당에 조성된 진무영 성지 안내문

 

강화발전의 중심지에 위치한 강화성당은 섬 주민들을 위한 꾸준한 노력과 순교자의 뜻을 이어받은 전교활동으로 강화지역 신앙의 기틀을 마련하여 교세를 확장시켰고, 차차 온수, 내가, 마니산, 하점 성당을 분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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