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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97

연안성당 성모자 이콘과 예수부활상, 성유함 연안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인천주보 3월 18일자 소개), 예수부활상, 성모자 이콘, 성요셉상, 14처 동상등이 조화를 이뤄 기도 공간으로서 성전이 더욱 돋보인다. 그중 성모자 이콘(圖像, icon)과 예수부활상, 성유함은 스테인드글라스와 더불어 연안의 빼놓을 수 없는 성물이다. 성전 입구의 성모자 이콘은 세월의 흔적 때문에 빛이 바래 있지만 자세히 보면 성모님 얼굴에 칼침과 같은 3개의 흔적이 그려져 있다. 이는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5)라는 시메온의 말을 상징한다. 이 성화와 더불어 성전안의 일명 ‘흑단 마리아와 예수’ 성모자의 이콘은 흑색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인류에 대한 타는 듯한 사랑의 표현이며 쉽게 볼 수 없는 것이다.. 2007. 4. 15.
13. 답동 성당 3개의 종 축성 13. 답동 성당 3개의 종 축성 1900년 주로 항구에 사는 교우들의 기부금으로 외국으로부터 종을 주문하여 답동 성당에 3개의 종이 들어오게 되었다. 1897년 성당 건물을 완공하여 축성했지만 당시에는 뾰족한 종탑만 있을 뿐 종은 설치되지 않았다. 1900년 4월 17일 드디어 종이 설치되고 종 축성식을 하였다. 탄압이 심했던 시기에 많지 않은 교우들의 힘으로 마련한 종이었기에 종소리가 인천 하늘에 울려 퍼졌을 때 신자들은 커다란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일제 탄압이 강해지면서 답동성당의 아름다운 종소리를 듣지 못할 위기가 닥쳐왔다. 일제말기에 사제들의 감금 탄압은 그치지 않고, 신학교와 성당, 병원은 징발하여 고사포 진지로 만들며, 성당에는 일장기를 게양하게 하고, 성당의 종도 무기를 만든다며 가져가는.. 2007. 4. 15.
12. 인천박문초등학교의 초기 모습 12. 인천박문초등학교의 초기 모습 1905년 이르렀다. 지난주 주보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00년 9월 1일 김교원과 강준에 의해 설립된 인천항 사립박문학교가 훗날 박문초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1909년 12월 8일 답동본당이 이를 인수하여 본당 주임 드뇌신부가 설립자 겸 학교장이 되어 신자자녀 및 불우한 아동의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박문학교 남자부의 시작이다. 한편 1912년 6월 26일 프랑스인 소루엠마엘 수녀가 인천 사립 박문학교 여자부를 시작하였다.(1899년 설립된 여자기술학교가 박문학교 여자부로 이어졌다. 지난주 주보 참조). 이들 가톨릭학교에서는 매일 한 시간씩 종교 시간이 있어 교리문답과 기타 종교 서적을 가르쳤으며 많은 학생들이 세례를 받았다. 1916년 7월에는 수녀들이 교육.. 2007. 4. 1.
한글로 간행된 한국 최초의 성경, 성경직해 성경직해는 한글로 쓰여진 한국 최초의 성경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는 유서깊은 책이다. 박해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어져 내려오던 한국교회에서 신자들에게 주어진 책은 중국에서 들여온 [성경직해(聖經直解)]와 [성경광익(聖經廣益)] 단 두 권 뿐이었다. 이 책들은 주일과 축일에 읽던 4복음서의 성경 구절을 발췌하고 해석이 붙어있던 한문본들이다. 1790년경 역관 출신인 최창현(요한)이 이 두 권을 합쳐서 필요한 부분만 번역하고 재구성하여 [성경직해광익(聖經直解廣益)]을 펴냈다. 1892년에 이르러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는 이들 필사본을 기준으로 해서 다시금 가다듬어 [성경직해]라는 이름으로 1897년까지 9권으로 나누어 간행하였다.(1∼5권 1892년, 6∼7권 1893년, 8∼9권 1895년에 간.. 2007. 3. 25.
11. 천주교회가 세운 최고의 여성 교육기관, 여자기술학교 개교 11. 천주교회가 세운 최고의 여성 교육기관, 여자기술학교 개교 1892년 르비엘 신부가 12명의 학생을 가진 학교를 답동성당(당시 제물포성당)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교우들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기에 계속하지 못하였다. 1년 후 비에모 신부는 교우들로부터 다시 학교를 세우라는 재촉을 받았지만 자격을 갖춘 교사가 부족하여 15명의 어린이들이 있었지만 학교를 세우지 못했다. 이처럼 인천의 선교사들은 오랜 동안 여학교를 세우고 싶어 했고 시도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었다. 교사도 부족했지만 당시 한국의 관습상 처녀들은 거의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학교에 다니기 위해 처녀들이 거리를 나다니는 것이 외교인들로 하여금 종교에 대한 불신감을 갖게 할 염려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선교사들은 생각만 하고 망.. 2007. 3. 25.
연안성당 스테인드글라스와 성화 연안성당 스테인드글라스와 성화 연안성당은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상흔을 간직한 채, 현재는 서해안의 수많은 도시를 잇는 입출항로를 바라보며 영생의 닻을 내리는 곳이다. 1960년대 초만 해도 썰물 때는 개펄에서 조개를 줍기도 했는데 인천항 제2도크 건설과 함께 간척사업의 붐을 .. 2007. 3. 18.
10. 해성보육원 개원과 봉사를 통한 선교활동 10. 해성보육원 개원과 봉사를 통한 선교활동 현재 인천지역 유일한 국내입양전문기관으로 자리잡고 있는 해성보육원의 시작은 1894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돌봐줄 이 없게 된 고아들을 수녀원으로 데려와 키운 봉사활동에서 비롯되었다. 지난주 주보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 2007. 3. 18.
1956년 건축된 김포성당 구(舊)성전 1956년 건축된 김포성당 구(舊)성전 60년이 넘는 긴 역사를 갖고 있는 김포성당에 들어서면 아름다운 석조건물이 눈에 띈다. 1956년에 건축된 김포성당의 구성전이다. 김포성당은 1946년 서울교구 걸포리성당으로 설립되어 1950년 김포성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62년 인천교구 관할이 되었다. 1953년 나무로 지어 축성한 임시 성당에서 불편을 느껴오던 신자들은 전쟁후 배당되는 구호물자의 일부를 팔아 성당을 신축하자는데 뜻을 모았다. 이렇게 신자들의 정성을 모아 완공한 99평 규모의 아름다운 석조성당은 김포 지역 신자수 증가로 이어져, 실제로 성당 건축 후 1년 9개월동안 신자수가 50%나 증가했다. 성당에서는 1999년 새 성전을 지어 축성하면서도 구성전을 그대로 보존하여 강당으로 이용하고 있다... 2007. 3. 11.
9. 인천 답동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첫 분원 설립 9. 인천 답동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첫 분원 설립 1893년 인천항에 장티푸스가 발병하여 많은 사람들이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갔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서 마라발 신부(당시 답동 주임)는 본당 내 헛간을 마련하고 환자들을 거두어 보살피고, 대세도 주었다. 서 마라발 신부와 당시 인천에 부임해 있던 홍 요셉 신부는 함께 일할 수녀들이 있다면 보다 많은 영혼을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여 뮈텔주교에게 수녀원 설립의 필요성을 보고하였다. 당시 한국에 진출해 있던 유일한 수도회인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본부에서는 한국의 요청을 들어주어, 서 요셉 신부는 답동에 마련한 부지 중 한 부분에 수녀원 공사를 시작했다. 1894년 8월 인천수녀원 공사가 완공되었고 8월 18일 2명의 수녀가 인천에 도착했다. .. 2007. 3. 11.
1954년 고잔 공소와 민종황 요한 1954년 고잔 공소와 민종황 요한 교세가 점차 증가하여 집에서 공소예절 드리기가 어려워지자 신자들은 자발적으로 부지를 매입하고 공소 건물을 준공하였다. 위 왼쪽 사진은 1954년 고잔 공소의 모습으로 여신자들이 대야에 모래를 퍼다 나르고 신대건 신부(주안1동 1대 주임)도 공사에 직접 참여하여 3개월만에 50여평의 공소 건물을 준공하였다.(1921년 답동 성당의 정식 공소로 설정, 1965년 2월 28일 본당 승격) 위 오른쪽 사진은 현재 마리아 집으로 남아있는 옛 고잔공소이다. 고잔, 그 신앙의 시작은 민종황(요한)과 그의 아들 민선훈(요셉)이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현재의 남동구 논현동 호구포 부근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1868년 당시 민종황은 이웃의 밀고로 호구포 붉은 북지(현 한국화약 사택.. 2007. 3. 11.
8. 김포지역과 관련된 교하의 천주교 교우촌 8. 김포지역과 관련된 교하의 천주교 교우촌 김포는 서해로 뻗어 있는 반도지역으로 한반도의 중심부를 점하고 있는 경기도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으로 강 건너 파주군 금촌읍 교하면과 고양군, 남쪽은 서울특별시와 부천시, 서쪽으로 바다 건너 강화군의 강화읍, 북쪽은 한강 건너 개풍군의 임한면, 홍교면에 닿아있다. 이렇게 주변지역과 중요한 관계를 이루는 위치에 있었던 김포지역에는 일찌기 1890년에 형성된 교하지역 교우촌의 영향으로 1897년에 천주교 신자들이 탄생하였다. 1886년 한불조약 이후 종교의 자유가 주어져 교세가 거듭 확장되었다. 당시 서울에는 1882년 설립된 종현 본당(현 명동본당) 하나뿐이었는데,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주교는 남대문밖에 집 한 채를 구입하여 공소를 개설하여 문밖공소라 .. 2007. 3. 11.
온수성당 성녀 소화 데레사 유해 온수성당 성녀 소화 데레사 유해 온수성당의 주보 성인 소화 데레사는 프랑스 알랑숑에서 출생하였으며 자매 가운데서 5명이 수녀가 되었다. 15세에 노르만디, 리지외의 가르멜 수녀원회에 입회, 1890년 서원, 1893년부터 수녀원장 보조수녀가 되었고, 1896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직전에 쓴 자서전 ‘영혼의 일기’는 성녀에 대한 존경이 전세계로 퍼져 나가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현대인들에게 추앙받는 성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는 성녀의 생애가 극단적인 금욕과 극기를 실천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통해 인간은 신성함에 이를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온수성당 2대 주임을 지낸 배도훈 아론 신부는 본당 신자들이 주보 성인인 소화 데레사를 가까이 느끼고 성인의 영성을.. 2007.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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