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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97

7. 인천의 첫번째 본당, 제물포 본당(현 답동 본당) 설립 7. 인천의 첫번째 본당, 제물포 본당(현 답동 본당) 설립 인천교구에는 현재 105개의 본당이 있다. 1889년 인천의 첫번째 본당인 답동본당 설립을 시작으로 1952년 부평2동(당시 부평본당), 1955년 송림동본당이 세번째로 생겨났다.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인천지역의 유일한 본당으로 있었던 답동본당은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을 하는 곳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사람들의 삶과 마음을 위로해 주고 고아들과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신앙으로 묶어 주었다. 이는 답동성당이 생기면서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인천 초대 분원이 설립되었고 이후 해성보육원, 박문학교, 유치원 등 지역에서 꼭 필요했던 여러 기관이 설립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889년 7월 1일 설립된 답동본당에는 빌렘(한국이름 홍석.. 2007. 2. 25.
해안성당의 전신인 선린화교성당 해안성당의 전신인 선린화교성당 해안성당의 옛 이름은 ‘선린화교성당’으로 북성동 3가 10번지 개신교회 옆 낡은 주택 이층방에서 시작되었다.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일본조계를 시작으로 1884년 청국지계(선린동 일대 5,000평, 일정한 범위 안에 외국인 전용 거주지역으로 그곳의 지방행정권을 그들 외국인에게 위임한 지역)가 형성되었다. 1958년 당시 답동성당에 다니던 중국 신자들은 언어소통의 불편함과 민족 이질감을 느껴 화교성당이 절실히 필요했다. 따라서 인천시 중구 북성동 3가 10번지 소재 개신교회 옆 이층방에서 중국 신자들의 전례 모임이 시작되었고, 1960년 7월 17일 답동성당과 화수동성당에서 분가하여 ‘선린화교성당’이 설립되었다. 북성동에 소재했지만 화교들이 모여 살았던 선린동의 이름을 .. 2007. 2. 17.
6. 비밀리에 신앙을 꽃피운 대골 공소 6. 비밀리에 신앙을 꽃피운 대골 공소 윤선기(윤용배의 아들. 1/28 주보 참조)가 18세 되던 해, 고향이 그리워 부인과 함께 고향 대골로 내려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윤선기는 자기가 왜 천주학쟁이의 후손이 되었으며 아버지는 왜 포졸에게 잡혀가 죽음을 당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을 알게된 윤선기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신자가 될 것을 굳게 마음먹었다. 그때 이미 대골에는 박해를 피해 한 교우집(시흥시 대야동 326번지)에 비밀리에 공소를 설치, 정춘화라는 교우가 회장이 되어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정춘화는 원래 충청도 서산에 살던 사람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등 가족들이 모두 천주교신자라고 하여 순교했다. 15살 되던 해 대골로 와 생활터전을 마련한 정춘화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뜻을 기리는 .. 2007. 2. 17.
계산동 성당 성녀 김성임 마르타 계산동 성당 성녀 김성임 마르타 계산동 성당 입구에 들어서면 성녀 김성임 마르타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계산동 성당은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한 분인 김성임 마르타와 관련이 깊다. 김성임 마르타는 부평 출신으로, 성녀가 살아 있을 당시 계산동 성당 부근에 부평도호부가 있었으며, 성녀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김성임 마르타는 늦게 천주교를 알게 되었으나 인내와 극기의 생활을 하며 믿음을 키워나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김성임 마르타는 순교를 결심하고 포졸들에게 묵주를 보여주며 자수하였다. 포장이 김성임 마르타에게 “천주교를 아느냐”고 물었을 때 성녀는 “참으로 나는 하느님을 알고 있으며, 죽을지언정 천주를 배반하지 못하고, 천주십계에 사람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 2007. 2. 17.
5. 병인박해 순교자 처형지 ‘제물진두’ 5. 병인박해 순교자 처형지 ‘제물진두’ 인천의 순교터로는 강화 갑곶진두와 진무영을 꼽을 수 있다. 이곳에서는 병인박해 중에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갑곶진두), 최인서, 장치선, 박서방, 조서방(진무영) 등이 참수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인천에는 이보다 더 많은 순교자가 .. 2007. 2. 17.
답동 성당 옛 감실과 예수성심상 사진) 왼쪽, 윗줄부터 1. 답동성당 옛 감실, 2. 예수성심상, 3. 1890년 최초의 답동성당 그림, 4. 성인 유해, 5. 성수 그릇, 6. 향합 인천교구의 주교좌 성당이자 첫 번째로 설립된 답동 성 바오로 성당은 1889년 당시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설립되었다. 답동 성당은 깊은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유물을 많이 보관하고 있다. 위 왼쪽 사진은 나무로 만들어진 감실로 동정 성모 마리아의 고결함을 상징하는 백합과, 창에 찔린 예수성심 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오른쪽 아래의 예수성심상은 오래전부터 예수성심성월이면 제대에 모셔 공경하고 있다. 예수성심상과 예수성심이 새겨진 감실을 보면 옛 신자들이 예수성심을 얼마나 공경했는지 그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성수를 담아 축성식, 장례식 등에 .. 2007. 2. 17.
4.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 박순집 베드로 4.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 박순집 베드로 갑곶성지에 가면 ‘신앙의 증거자’라고 적혀있는 박순집 베드로의 묘를 만날 수 있다. 박순집의 삶은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하고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에 큰 공을 세웠다는데 의미가 깊다. 또한 1890년에 인천 제물포로 이주하여 1911년에 숙골(현 도화동)에서 82세의 나이로 선종할 때까지 20여년 동안 전교활동에 힘쓰며 인천교구와 인연을 맺었다. 박순집이 증언자의 삶을 살게 된 연유는 그의 아버지의 삶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해박해 때 박순집의 아버지 박 바오로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하여 순교한 주교, 신부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하고 아들 베드로를 데리고 가서 훗날 성교회에서 성직자 무덤을 찾으면 잘 가르쳐줘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박순집은 1866년 병인박해.. 2007. 2. 17.
성교감략, 천주교 요리문답 성교감략, 천주교 요리문답 최초의 성교감략은 중국 북경 교구장인 들라플라스 주교가 성경을 역술한 것이며, 한글본 성교감략은 한문본을 번역한 것이다. 한글본은 조선 교구의 보좌 주교였던 블랑 신부에 의해서 첫 간행되었으며 위의 책은 민덕효 신부가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1931년 인쇄(1908년 초판, 1931년 재판)되었다. (기증 : 고잔 김임수 마르코) 천주교 요리문답은 천주교 교리의 기초가 되는 입문서이며 위 책은 총 136페이지로, 1964년 가톨릭 출판사에서 발행하였고 10원에 판매되었다. (기증 : 고잔 이순이 카타리나) 천주교 요리문답 외에도 많은 책과 사진을 기증하신 이순이 할머니는 고잔 공소일 당시 역사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두번째 사진은 1954년 고잔공소를 짓기 전 공소로 .. 2007. 2. 17.
3. 부천지역 최초 치명자 심락천, 윤용배 3. 부천지역 최초 치명자 심락천, 윤용배 부천·시흥 지역은 지역의 발전과 더불어 교세도 점차 확장되고 있다. 이같은 결과에는 현재 신자들의 노력에도 물론 그 공이 있겠지만, 박해시대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후손들에게 신앙을 전해준 조상들의 몫도 크다고 할 수 있다. 바로 부천지역 최초의 치명자라고 전해지는 심락천과 윤용배가 그들이다. 병오박해 즈음 서울에 살던 심락천의 아버지가 치명을 당하자 심락천은 가족과 함께 함박리(조선시대엔 인천부에 소속, 1914년 부천군이 됨)로 내려와 옹기를 굽고 생활하였다. 그 속에서도 심락천은 밤이면 가족들을 모아놓고 몰래 기도를 하는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함박리에서 좀 떨어진 대골 방아다리 부근(현 경기도 시흥리 대야동)에 사는 윤용배에게 천주학의 교리가.. 2007. 2. 17.
도화동 성당 장 베르뇌 주교와 무명 순교자의 유해 사진) 왼쪽 위부터 1. 장 베르뇌 주교 유해와, 무명 순교자의 유해 2. 장 베르뇌 주교 초상화 3. 성유함 4. 성반(성체를 입으로 영할때 사용했던 성반) 5.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상 도화동 성당 장 베르뇌 주교(左)와 무명 순교자의 유해(右) 도화동 성당 제대에는 성인 두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바로 조선 제4대 교구장 장 베르뇌 주교와 St.francisci라고만 적혀있는 무명 순교자의 유해다. 장 베르뇌 주교는 한국 교회사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프랑스 르망교구 출신인 장 주교는 1837년 사제수품 후 베트남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어느 날 베트남으로 가던 중 들른 마카오에서 최양업과 김대건 신부를 만난 것을 계기로 훗날 한국에 입국하게 되었다. 1856년 서.. 2007. 2. 17.
2. 이승훈 베드로, 황사영 알렉시오 2. 이승훈 베드로, 황사영 알렉시오 지난 주보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천 장수동은 이승훈이 참수된 후 안장된 곳이고, 인천 강화는 황사영이 탄생하여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이처럼 인천과 강화는 비교적 일찍부터 복음이 전래되었고, 천주교회 창설부터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700년대 후반 가톨릭을 전파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승훈과 황사영은 모두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순교하였다. ● 한국 천주교회의 선각자이며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의 묘가 있는 장수동 반주골 남동구 장수동 반주골에는 한국천주교회의 선각자요,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베드로)과 아들 신규, 택규의 묘가 있다. 이승훈은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그들로부터.. 2007. 2. 17.
1.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복음의 전례부터 박해 시대의 인천 제 1부 ; 인천교구 전사 1.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복음의 전례부터 박해 시대의 인천 인천지역에 언제 첫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다만 이승훈 일가와 황사영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인천과 강화에는 비교적 일찍부터 복음이 전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인천은 한.. 2007.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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