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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25. ‘소사의 빛’이라는 뜻을 가진 소명가정실습학교

by 세포네 2007. 7. 15.

25. ‘소사의 빛’이라는 뜻을 가진 소명가정실습학교

 

1950년 6.25 전쟁 후 빈농의 농촌마을 소사 땅에는 굶주림과 함께 배우고 싶어도 배울 길이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 찾아왔다. 이에 소사본당 신성우 신부가 주머니를 털어 대학생 몇 명을 불러 성당 지하에서 야학을 계획하여 문을 열었다. 그러나 막상 학생들이 오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야학을 시작한지 1년도 못되어 지하실이 모자랐다. 당시 야학에서는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으나 신성우 신부는 사회에 나가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고자 소사성당 성가 수녀회 수녀들에게 ‘재봉 수예’수업을 부탁했다. 그러나 야학에서 기술을 가르치는 일이 쉽지 않았기에 신성우 신부는 기술학교를 세워 학교명을 ‘소사의 빛’이라는 뜻으로 ‘소명’이라 짓고 경기도에 소명 가정기술학교를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학교 신청을 해놓았지만 교실이 없어 여러모로 수소문 끝에 소사본당 장인근의 도움으로 2개의 교실을 마련하여 1957년 10월 5일 소명 가정기술학교 허가가 나왔다. 개교당시 학생은 60명, 교과목은 재봉, 자수, 타이프라이터 등이었다. 소명 가정기술학교 개교 후 소사성당 지하에서 시작한 소명 가정 기술학교의 전신이었던 야학은 아쉬움을 남기고 문을 닫아야 했다. 

소명 가정기술학교는 소사지역의 많은 학생들이 입학을 원할 무렵인 1960년경 학교의 운영을 성가소비녀회에서 맡게 되었고, 1961년 6학급에 1백 20명의 학생으로 문교부로부터 ‘소명여자중학교’라는 학명으로 새로이 인가받았다. 소명여중의 개교는 가톨릭계는 물론 소사지역 사람들에게 있어 배움의 갈증을 해소하는 기회가 되었다. 초대 교장 신성우 신부는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게’라는 교육이념으로  1962년 3월 17일 인문계 소명여고를 개교함으로써 소명여중은 고등학교와 함께 이 고장 최초의 사립학교가 되었다. 

초창기 학교운영에 있어 경제적, 지역적 시련이 컸었으나, 그것보다 생각과는 달리 지역 사람들의 학교 경시에서 오는 소명 진학의 기피현상의 어려움이 가장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우 교장 신부는 이 고장의 여성교육을 위해 신념과 긍지로, 그리고 가톨릭의 사명감으로 학생들에게 여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지식과 덕성을 심어주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어려움을 극복하던 1963년 6월 28일 최민순 신부가 제2대 교장으로, 이어 1966년 9월 10일엔 권영창 수녀가 제3대 교장, 1968년 8월 24일 제4대 교장으로 이운용 선생이 취임하면서 문교부의 상업교육 진흥책의 일환으로 상과를 증설하고 학교이름도 소명여자중.종합고등학교로 변경하였다. 아울러 관광과를 신설하였고 1970년에는 부천에서 처음으로 현대식 건물로 4층교사가 준공되었다. 1972년 12월에는 간호과를 증설하여 국가 검정고시에서 99%의 합격률을 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문교부의 시책에 따라 소명여중과 소명여고로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었고, 1993년 3월 1일부터 사랑의 씨튼 수녀회에서 관리·운영하며 부천지역 여성교육의 요람이 되고 있다. 
< 정리:홍보실 / 참고자료:소사본당반세기>

좌) 1968년 재봉 시간 / 우) 1962년 종교 수업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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