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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41. 인천주보 1000호 발행

by 세포네 2007.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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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주보가 탄생하기 전에는 각 본당에서 주보를 자체 발행했다. 그러다가 교구민의 일치와 주보 편집의 전문성을 기하고자 1979년 11월부터 답동성당을 비롯한 16개 본당에서 자체 발행하던 주보를 통합하여 ‘인천주보’라는 이름으로 공동제작에 들어갔다. 그 당시 주보 발행 부수는 8,000부 정도로, 4.6판 4면 크기였기에 지면을 쪼개고 쪼개어도 담아야 할 내용의 원고 분량은 항상 넘치는 상황이었으므로 증면호를 자주 발행했다. 특히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과 최기식 신부 구속 사건에 대한 속보와 방청기를 담아내기 위해 당시에는 거의 격주로 8면을 발행하였다.

1980년 초반 인천주보는 인천 지역에서 관심을 모으는 홍보 매체가 되었다. 광주사태의 참극을 비롯하여 사회는 침묵을 강요당했고 언론은 무기력했다. 그나마 인천주보가 사회 비판과 함께 권력의 치부를 고발하며 독자들의 갈증을 달래주었다. 그러나 인천주보 또한 정부의 검열과 삭제 회수가 빈번하였다. 신자들은 부분 부분 문구가 수정되고 때로는 백지로 나가는 주보를 나름대로 추측하며 읽어 나갔다.

1983년부터 주보가 4면에서 8면으로 증면되었다. 늘어난 4면 분량에는 신자들의 재교육과 보다 많은 시사, 사회 교리 등을 싣게 되었다. 또한 그 무렵 교구에서는 한국 공의회라고도 일컬어지는 사목회의를 독자적으로 진행하게 되어 평신도들의 비판적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1987년 사회의 변화와 함께 교회 내적인 변화도 수반되었다. 민주화의 분위기는 신자 개개인을 변화시켜 교회는 보다 다양한 신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이에 주보의 내용도 교회의 기본 교리에 충실하고 영성 생활을 돕기 위한 내용으로 변화되었다. 

통합주보가 발행된 지 10년 되던 해인 1989년 10월 22일 인천주보 1,000호를 발행하게 되었다. 십년동안 주보 부수는 56개 본당, 50,000부로 증가했다. 교구의 성장과 본당의 증설로 발행 부수는 계속해서 늘어났고, 인천주보 발행 약 30여년이 흐른 지금은 102개 본당에 7만 4천부가 배송되고 있으며 내년 9월 2000호 발행을 앞두고 있다.
인천교구 초기 주보발행처는 사목국 주보 편집실이었고, 1983년 12월 18일에는 홍보교육국의 홍보부로, 1986년 2월 9일부터는 다시 사목국 홍부부로 편제가 변경되었다. 2000년도 교구대의원회의(시노드)의 결과로 사목국 홍보부가 사무처 홍보실로 변경되었으며 홍보실담당사제가 생겨났다. 

2007년 현재 인천주보는 ‘교구설정 50주년 준비의 해’를 맞이하여 주보1면을 통해 본당의 역사와 소장 유물을 소개하며, 더불어 4면은 50주년 기획 특집으로 인천 개항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천교구의 역사이야기가 게재되고 있다.  < 정리:홍보실  / 참고자료:인천교구사>



1989년 10월 22일 인천주보 1000호에 실린 소식면 기사(요약)

 

이 땅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한  인천교구 기도회


‘이 땅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한 기도회’가 지난 10월 16일 오후 7시 답동성당에서 있었다. 

1부 미사중 강론에서 문정현 신부(전주교구, 구속된 문규현 신부의 친형)는 “사제단이 문규현 신부를 북으로 보냈던 이유는 첫째, 어린 양 임수경 수산나 자매를 돌보기 위해서였고 둘째,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더 이상 한 형제를 적으로 규정해야 하는 현실의 아픔을 방관할 수 없어서였다.”고 강조했다.

미사 후 1천 여명의 참석자들은 사제단을 선두로 이 땅의 평화와 통일을 간구하는 촛불행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경찰이 가톨릭회관을 입구부터 원천봉쇄함으로써 가두진출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사제단의 항의 끝에 그 자리에서 간단한 기도회로 2부 순서를 갖고 이번 행사를 마무리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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