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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58] 바젤 공의회

by 세포네 2005.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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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 젤 성 당
스위스 바젤 대성당. 바젤에서 강력히 주장된 공의회 우위설은 교황들로 하여금 공의회를 기피하게 만들어 16세기 종교개혁시 적시에 공의회를 개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작은 사진은 마지막 대립 교황을 선출한 뮈켈 하우스.

 

 

 공의회 우위설 맞서 교황권 회복

공의회 개최 기피…개혁 시기 놓치기도
교회일치 원칙 “의식은 자유롭게” 제시

스위스 북부의 바젤. 프랑스와 독일 국경이 접하는 곳이다. 스위스 제2의 도시이기도 한 바젤의 주교좌 성당을 찾았을 때 성당 앞 광장에서 축제가 한창이었다. 주교좌 대성당 완공 500주년 기념 축제였다. 그러나 이 축제에 참가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1529년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측에 성당을 빼앗겨 지금은 예배당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성당 맞은 편 광장 오른쪽에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작은 건물이 서있는데 이 건물이 바로 마지막 대립교황 펠릭스 5세가 선출된 곳이다. 마지막 이교의 현장이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교회 분열을 가져 온 교황권을 제한할 목적으로 교령 프레구엔스(Freqeens)를 통해 콘스탄츠 공의회 폐막 후 5년 뒤와 7년 뒤 그 이후엔 10년마다 정기적으로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의무화했다. 마르티노 5세 교황은 이 교령에 따라 1423년 파비아에서 공의회를 개최했으나 페스트 등의 이유로 다음 공의회를 7년 후 바젤에서 개최하기로만 합의하고 끝이 났다. 그러나 마르티노 5세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대두된 공의회 우위설에 대한 거부반응 때문에 소집을 주저했다. 또한 바젤시는 오스트리아와 부르군드와의 전쟁으로 위험했으며 시민들도 성직자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교황이 공의회 소집을 주저하자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서 압력이 가해졌고 교황에게 순종을 거부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마르티노 5세는 1431년 공의회를 개최하기로 했지만 곧 선종하고 말았다. 뒤이어 교황이 된 에우제니오 4세는 곧바로 공의회 개최를 선언했지만 역시 공의회에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교황과 공의회 우위설을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1431년 7월 23일 공의회가 개최됐다.


바젤 공의회에는 소수의 주교들만 참석했으나 교회개혁을 바라는 성직자와 평신도, 대학교수, 신학자 등이 대거 참석했다. 개혁은 당대의 요구였던 셈이다. 공의회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개혁 완수, 이단의 근절, 제국들간의 평화, 동방교회와의 재일치 등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공의회는 기대와는 달리 교회의 행정부 혹은 상급법원을 자처하며 「공의회 우위」를 주장하는 데에만 관심을 보였다.


사실 18회기까지 공의회는 『공의회 결정에 의하지 않으면 누구도 공의회를 폐막할 수 없다』, 『공의회 중에 사도좌가 공석이 될 경우 공의회 밖에서 교황을 선출할 수 없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언급한 공의회의 권위와 권력을 재천명한다』 등 공의회 우위설을 주지시키기 위한 결정을 내렸을 뿐이다. 또한 교황청에 바치던 여러 세금의 납부를 전면 중지시켰다.


당연히 교황은 교황의 권력을 축소하고 공의회의 행정권을 확대하려는 이러한 의도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마침 오스만 투르크의 침입으로 함락 직전에 있던 동로마제국이 서유럽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해왔다. 그러나 이는 이전에 신앙의 재일치가 이뤄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에우제니오 4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바젤을 벗어나고자 동방교회와의 재일치를 협의할 장소로 피렌체를 제안했고 공의회론자들은 바젤을 고수했다. 동방의 대표들이 교황의 제안대로 이탈리아 내의 도시에서 개최할 것을 받아들이자 개최지 문제를 둘러싸고 두파로 갈라졌다. 1437년 교황은 공의회를 페라라로 이전할 것을 선언했고 교황 지지자들은 바젤을 떠나 이듬해 1월 8일 페라라에서 공의회를 속개했다. 이때부터 바젤과 페라라에서 두 개의 공의회가 열렸다.


이런 상황에서 중립을 취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교황 지지로 돌아섰고 독일마저 지그문트 황제의 사망 이후 제후들이 중립적 자세를 취하거나 교황을 지지했다. 상황의 불리를 느낀 바젤의 공의회론자들은 점점 격렬하게 공의회의 우위를 주장하다 마침내 『교황이 공의회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신앙으로 선포했다. 여기에 따라 바젤 공의회 측은 에우제니오 4세를 폐위시키고 1439년 11월 5일 평신도이던 사보이의 공작 아마데우스를 대립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는 펠릭스 5세로 명명했다.


이교를 막기 위해 대두됐던 공의회 우위설이 새로운 이교를 부른 결과를 가져왔다. 교회 역사상 마지막 이교다. 서구대이교의 폐해를 경험한 후 새로운 교회분열을 원치 않는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교황을 지지하자 공의회 우위설은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페라라 공의회는 바젤 측의 공세에 페라라 공의회가 적법한 보편 공의회 임을 천명하는 내용을 반복하다 또다시 페스트로 인해 장소를 피렌체(플로렌스)로 옮겼다.
피렌체 공의회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무엇보다 『신앙이 동일하면 의식은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교회 일치를 위한 원칙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평가를 받고 있다. 동방교회는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에 대해 서방의 원조를 얻어내야 할 필요성에서, 서방교회는 공의회 우위설 등에 위협받는 교황권과 정통성 확보를 위해 서로 양보했다. 그 결과 주요 신학상의 문제들에 있어 합의를 이루었다. 그리고 양 교회는 1439년 7월 6일 레텐투르 첼리(Laetentur Coeli) 일치 교령에 서명함으로써 일치를 회복했다.


그러나 이 일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동방에서는 성직자들이나 백성들이 지도자들의 뜻을 따르지 않았고 기대했던 군사적 원조도 없었기 때문에 일치는 유지될 수 없었다. 또한 서방 국가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운명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해 십자군이 결성되지 못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함락되어 동서방 교회의 모든 관계가 완전히 단절됐고 차이점은 더 커져갔다. 1472년 피렌체에서의 일치교령은 정식으로 철회됐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대두돼 바젤에서 신조화하려 했던 공의회 우위설은 지지자들을 얻지 못한 펠릭스 5세가 1449년 사임함으로써 교황권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교황청의 권위와 힘에 심각한 타격을 준 것도 사실이었다. 또한 공의회 우위설이 언제 다시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교황들의 불안감은 공의회 개최를 기피하게 만들어 한계점에 달했던 교회 개혁을 늦추었고 결국 16세기 종교 개혁이 일어났을 때 적시에 공의회를 개최하지 못하게 한 원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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