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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59]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

by 세포네 2005.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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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 교황들의 문화적 업적은 놀랄만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맡겨진 보편교회의 사명을 외면했다는 비판은 벗어날 수 없다. 사진은 식스투스 4세 시절 건립된 바티칸의 시스틴 성당.

 

 

세속 권위에 몰두 교권 추락
사생아를 추기경이나 영주로 임명
공명심 탓에 문예진흥에는 이바지

중세 예술의 대표적 양식을 고딕(Gothic)이라 부른다. 이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중세문화를 비하하기 위해 붙인 말로 야만적인 고트족의 작품이란 뜻을 품고 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중세를 5세기 로마제국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르네상스 이전까지의 야만시대로 규정하고 근대의 시초를 고대의 연장선상에서 찾고자 한다. 이 같은 사고는 개인보다는 교회와 신중심적인 문화였던 것에 대한 반동으로 14~15세기 부패한 교회상에서 기인하는바 크다.


르네상스의 시작
르네상스(Renaissance)는 재생, 부활 등의 뜻을 지닌 프랑스어로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부흥을 통한 새로운 문화 창출 운동으로 사상 문학 미술 건축 등 다방면에 걸쳐 일어났다. 근대유럽 문화 태동의 기반이 된 르네상스는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 내에서 시작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을 안고 있었다. 먼저 문화적으로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의 역사 유산들이 잔존해 있었고 로마 문화에 대한 향수가 높았다. 또한 지리적으로 이탈리아는 동서교류의 중심지로서 이슬람과 비잔틴의 문화를 서유럽에 소개하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해왔다. 정치 경제적 요인으로는 11~12세기 상업의 부활로 상당한 부의 축적을 이루었으며 자치도시의 발달과 봉건 사회의 몰락으로 시민계급이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동로마제국이 멸망하자 그리스 문화를 지닌 비잔틴 계열의 학자들이 대거 유입됐고 교황과 황제들간의 오랜 갈등으로 양편 모두 기진맥진한 상태로 새로운 상황이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세속화된 교회가 시민들의 영적 갈증을 해소해주지 못하는 사이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논리학과 형이상학 등 신앙 중심의 학문은 언어 문학 역사 윤리학 등으로 대치되면서 도덕적 인간형의 완성을 위한 수단으로 고전을 탐독하기 시작했던 것이 르네상스의 시작이었다.


여기에 15세기 들어 교황중심의 그리스도교적 보편국가가 무너지고 각 나라마다 근대군주국가가 성립되면서 중세의 지배이념이었던 그리스도교와 집단주의가 해체되고 세속주의와 개인주의가 등장한다.


또한 인쇄술의 등장으로 프랑스 영국 독일 등지로 르네상스가 급속히 전파되면서 신앙에 있어서도 초대교회의 순수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풍으로 성서연구 등이 활발해졌다.
결국 르네상스는 중세의 정신생활을 지배해오던 그리스도교가 반목과 부패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자 그리스도교의 이상과 이념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면서 시작된 새로운 정신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신중심의 중세 문화에서 인간성을 강조했던 고대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고 이를 인문주의(Humanism)라고 한다.


이 시기의 교황들
르네상스 교황이란 1440년에서 1520년까지 르네상스 시기에 활동한 교황을 일컫는다. 이 시기 교회는 교황청의 아비뇽 유배와 서구 대이교 등을 거치면서 쇄신의 목소리가 높았던 시기이며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위협이 높았다. 또한 이탈리아 내의 도시 국가들 간의 분쟁이 극에 달했고 동시에 민족국가들의 등장으로 군주들이 성직 서임권을 마음대로 처리하려는 국교회 사상이 드높았던 시기였다.


따라서 어느 때보다 영적 임무에 충실하고 교회 개혁의 과업을 성실히 수행할 교황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히려 교회를 속화시키고 교황직을 부패시킨 교황들이 줄을 이었다. 마치 10세기 카롤링거 왕조의 몰락이후 닥친 교황들의 암흑시기가 다시 도래한 듯 했다. 이 시기의 교황들은 「베드로 세습지」를 하나의 사유 영지처럼 생각하며 스스로 한 국가의 군주처럼 행동함으로써 교황직의 보편적 사명을 잃어버렸다.


또한 교황들의 이러한 영주적인 공명심은 로마를 예술품으로 장식하는 데에 더 관심을 쏟게했고 문란한 생활을 통해 얻은 사생아들에게 영지를 주는 데 혈안이 되기도 했다. 가능한 자신의 조카나 아들 등 일가친척에게 성직과 영주의 자리를 주려는 이러한 족벌주의는 이 시기 교황들의 특징처럼 돼버렸는데 이는 결국 종교개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교황령 지역들을 아들이나 조카에게 봉토로 주었을 뿐 아니라 아예 교황령에서 빼내어 독립 공국으로 만들려고까지 했다. 사실 족벌주의는 강력해진 세속군주들의 도전에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해 강력한 교황권을 갖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된 것이었으나 그 폐해가 너무 컸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에 의해 임명된 추기경단은 그 능력이나 신앙적인 면에서 너무 세속화되어있었으므로 결국 또다시 부자격한 교황을 선출하는 악순환을 되풀이 했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 교황들 중 특히 식스투스 4세부터 레오 10세까지의 50년 간은 교황권이 최악으로 퇴폐한 시기였다.
시스틴 성당을 설립한 식스투스 4세는 후에 율리오 2세 교황이 된 조카를 비롯해 2명의 조카를 추기경으로 만들었고 또 다른 조카에게는 이몰라를 공국으로 주는 등 족벌주의를 제도화 해 교황청과 추기경단을 속화시켰다. 뒤를 이은 인노첸시오 8세 교황은 추기경 매수를 통해 교황이 된 인물로 신부가 되기 전에 두 명의 사생아가 있었는데 이들의 결혼식을 바티칸에서 성대히 거행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사돈인 메디치가문의 13살짜리 소년을 추기경으로 임명하기도 했는데 이 사람이 후에 레오 10세 교황이다.


인노첸시오 8세의 뒤를 이은 알렉산데르 6세는 교황 역사상 가장 최악의 교황이다. 삼촌인 갈리스도 3세 교황에 의해 추기경이 된 뒤 성직매매를 통하여 교황에 선출되었다. 알렉산데르 6세는 4남1녀의 사생아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추기경으로 임명했고 나머지는 모두 교황령의 영주로 만드는 등 족벌주의를 일삼았다. 예수회 3대 총장은 그의 손자다.


비오 3세와 같이 청렴하고 신앙심 깊은 교황들도 있었지만 르네상스 시기의 교황들은 대부분 영적 지도자라는 교황상을 갖추지 못했으며 세속적인 권위를 지키는 데에만 몰두하여 교황권의 위신을 추락시켰다. 목자로서보다는 군주 혹은 장군의 입장에서 통치한 교황들은 비록 르네상스 시대의 문예진흥에 크게 이바지했으나 세속적인 것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긴급한 교회 개혁을 등한시했고 족벌주의로 교회폐해를 더욱 심각하게 했다. 심지어 루터의 개혁을 단순히 수도자들의 논쟁으로 치부해버리고 개인적 관심사에 심취해버리기도 함으로써 교회는 돌이킬 수 없는 처참한 타격을 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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