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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61] 루터의 ‘탑실 경험’

by 세포네 2005.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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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통해서만 구원” 확신



독일 작센안할트 주에 위치한 공업도시인 비텐베르크.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탑실에서 독일의 신학자이며 종교 개혁자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이른바 「탑실 경험(Turmerlebnis)」이라고 불리는 신앙 체험을 한다.
그는 이 체험 속에서 인간은 결국 죄와 욕망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지상에서 선행을 쌓고 공로를 세움으로써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게 된다고 확신을 하게 된다.
바오로 사도의 『의인은 신앙으로 살게 된다』는 로마서 4장 17절의 말씀에서 루터는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불안과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됐고 스스로 양심의 평화를 누리게 됐다고 할 수 있다.
루터가 수도원 안에 살고 있을 때 그에게 신은 죄인을 단죄하는 공포의 신으로 제시됐고 그 때문에 그는 항상 신을 향한 두려움과 원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인간은 오로지 신의 은총으로만 구원되고 신앙 안에서만 의롭게 된다고 믿음으로써 그는 새롭게 태어난 것 같았고 여기서부터 성경 말씀이 그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게 된다.
영웅 혹은 이단의 괴수
루터는 어떤 이들에게는 「신앙의 영웅」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이단의 괴수」였다. 이처럼 서로 상반되게 나타나는 루터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교파적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의 결과인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루터 자신에게서부터 이러한 상반된 견해의 요인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루터의 말이나 저서들을 통해서 루터라는 인물과 사상을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은 종교개혁자라고 할 수 있는 칼빈(Jean Calvin, 1509~ 1564)은 자신의 신학 사상을 완벽한 체계로 서술해 4권의 신학 총서를 남겼지만 루터는 이러한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저술, 강의와 토론, 설교, 편지 등을 남겼을 뿐이며 그의 개인적 성격과 체험 및 논쟁적 어휘들 때문에 그의 저서 안에는 역설적인 표현들도 많이 발견된다.
루터교 신학자 뵈머(H. Bohmer)는 1906년 『루터의 저서들보다 더 많은 루터가 있다』고 고백한 일도 있다. 이는 루터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존재하는 다양성 뿐만 아니라 루터 자신이 이런 해석들로 이끌수 있는 위험과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가톨릭에서는 세기를 거쳐 오며 루터에 대해 비판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왔으나 19세기초 묄러(J. A. Mohler)나 현대의 로르츠(Josef Lortz) 같은 사가들의 노력으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이들의 편견을 배제한 객관적 연구 결과로 가톨릭교회는 루터의 종교 개혁 동기와 사상의 일부 정당성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 후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일치교령」을 통해서 증오와 불신의 장벽을 넘어 루터에 대한 부정적 견해에 대해 재고를 요구했다. 이에 따라 오늘날 교회 사가들은 반 가톨릭적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근거해 비난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루터를 「가톨릭 루터」(1483~1520)와 「프로테스탄트 루터」(1521~1546)로 나눠 평가하고 있다.
가정 학교서 엄격한 교육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신성로마제국의 튀링겐 지방의 작센 공작령에 위치한 아이스레벤에서 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8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나 이듬해 성 베드로 성당에서 「투르의 마르티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는 유년 시절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훗날 스스로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듯 엄한 가정교육과 학교에서의 철저한 윤리 교육 등은 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무서운 심판자로 인식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어릴 적부터 그리스도란 이름만 들어도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지곤 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를 오직 엄격한 분노의 심판자로만 생각하게 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루터의 이러한 심리상태는 그의 성품과 함께 훗날 그의 신학 사상이 형성되는데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해 1505년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변호사가 되기 위해 5월 법학부에 등록을 한다. 바로 그 때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놓게 된다. 당시 22세의 법률학도는 고향에서 방학을 지내고 다시 에르푸르트의 대학으로 가던 도중 시골길에서 갑자기 벼락을 만난다. 바로 옆에 벼락이 떨어진 순간 놀라 말에서 떨어진 그는 공포에 질려 『성녀 안나여, 나를 구해주시면 일생을 수도원에서 바치겠습니다』 하고 애원한다.
이 서원은 그가 오래전부터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구원의 열망이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평소부터 수도생활이 구원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해왔고 그것이 죽음에 직면한 순간, 하느님의 심판 및 지옥벌에 대한 두려움이 결정적으로 이러한 생각을 폭발하도록 유발했던 것이다.
루터는 부모와 친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7월 17일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에 입회한다. 수도회에 입회한 그는 규칙에 따라 엄청나다 할 정도로 성경을 읽었다. 하지만 그는 성경과 자신과의 내적 관계를 더 중요시했고 성경을 주관적, 체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러한 특징과 함께 그는 신을 항상 무서운 심판자로 받아들였다.
루터의 이러한 신관은 그후 유명론 신학에 대한 관심으로 더욱 굳어지게 된다. 유명론에 따르면 신은 절대적 자유의지이며 인간이 구원되거나 단죄되는 것은 인간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원해서 이뤄지는 것이다.
루터는 『내가 어떻게 하면 자비로운 신을 얻을 수 있는가』, 즉 자신의 구원의 불확실성에서 나오는 거듭되는 질문을 바탕으로 열심하고 엄격한 수도생활을 통해서 구원의 보장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구원의 보장은 확실해지지 않았고 자기 자신 안에서 나타나는 이기심과 욕망, 육욕이 그대로 남아있음을 보면서 신의 분노 앞에 공포만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한 좌절과 공포와 두려움의 순간에 그는 스스로 「탑실 경험」이라고 부른 순간적인 영감을 통해서 새롭게 신앙과 구원을 인식하게 됐다.
루터는 그후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의 설교가로 또 비텐베르크 수도원 부원장과 신학연수원장으로 임명됐다. 비텐베르크 대학에서도 신학대학 교수로서 스콜라 사상을 성서와 초대교부로 돌아가자는 성서인문주의로 대치시키는 교육개혁을 착수하는데 중심인물이 된다. 그리고 1517년 5월, 「97개항 신학 명제」를 발표해 이를 독일의 대학들에 발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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