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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60] 인문주의와 에라스무스

by 세포네 2005.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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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라스무스는 『폐해는 제거되어야 하지만 신앙의 실체가 침해되어서는 안된다』고 믿었다. 사진은 한스 홀바인 작 에라스무스 초상, 루브르박물관, 나무캔버스 위에 오일.

 

 

 순수한 복음정신 회복 주창
위선과 미신.교계제도 폐해.형식주의 배격
“분열통한 개혁보다 용서.쇄신으로 정화를”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
중세기의 유럽은 지금의 유럽연합(EU) 보다 더욱 강력하게 통합된 하나의 사회였다. 지금의 유럽연합이 경제, 즉 돈을 매개로 한 경제 공동체에 불과한 반면 당시 유럽은 신앙을 매개로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통합을 이루고 있던 단일체였다.


그러나 중세 말기에 이르러 교황권의 추락 등과 함께 민족국가들의 군락으로 변모돼 있었고 이러한 민족국가의 형성은 자연 교회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며 이른바 민족적이고 영토적인 개념의 국교회 사상을 등장시켰다. 어느 곳의 통치자들도 교황의 간섭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국내 교회에 관한 일일지라도. 콘스탄츠 공의회 이후 영국, 독일, 프랑스 등 각 국 정치 세력들이 공의회 우위론자들을 지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세계의 해체보다 더욱 큰 문제는 교회의 세속화로 인한 「영적 취약성」에 있었다. 당시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있던 신앙적 고뇌와 갈증을 해소해 줄 능력이 없었다. 오히려 교회가 고뇌의 원천으로 비춰졌다. 이처럼 중세 말의 교회가 사람들의 신앙심을 충족시켜 주고 단련시켜 주는 영성과 신학을 제공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 종교개혁의 성공적 요인이 됐다.


성인공경과 성지 순례, 죽은 이를 위한 기도, 연옥 교리 등은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이런 대중 신심들이 올바른 지도를 받지 못해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형태로 흘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는 영적인 일에 몰두하기보다는 교회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제후들과 투쟁을 일삼는 등 세속적인 일에 더 몰두해있었다. 또한 교회 내치도 법치주의에 젖어 복음 정신의 삶보다는 각종 준수사항과 금지조항만이 남은 죽은 교회로 전락했고 단순한 관습의 종교가 됐다. 더욱 고약했던 것은 성직자들 사이에 만연한 권위주의와 배금주의로 성사를 비롯한 사목행위들을 계량화해 세금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밤베르크 신부들의 경우 성혼 선언 대가로 9페니, 혼인미사시 48페니, 장례식 240페니, 부활판공성사 1페니, 세례성사 12페니 등을 받을 정도였다.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 10페니 정도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비록 전쟁과 전염병 등으로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교육의 확장기였다. 군주들과 제후들은 비록 보편 교회 이념에 대항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이론을 전개하기 위한 목적에서였지만 각종 대학들을 설립했다. 1300년과 1500년 사이에 유럽의 종합대학은 20개에서 70개로 늘어나 있었고 각 나라마다 각종 단과대학들이 무수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미 1500년에 이르러 독일 전체 인구의 약 3~4%인 40만 명 정도가 읽고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교육의 확장은 사람들에게 비판적 기질을 길러주었고 동시에 급속히 발달하기 시작한 인쇄술은 이를 더욱 증폭시켰다.


신자들은 출판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한 모국어 성경을 직접 읽음으로써 교회의 폐해를 지적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인문주의가 알프스를 넘어 북유럽으로 전파되면서 신앙에서도 성서나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가 형성됐다. 그 대표적 인물이 프랑스의 르페브르(Lefevre), 잉글랜드의 토마스 모어(Thomas More),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등이다. 그 중에서도 인문주의자들의 왕자로 불리는 에라스무스는 후대 개혁가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인문주의자들의 왕자
1466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성직자의 사생아로 태어난 에라스무스는 9살 때 인문주의자 헤지우스(Hegius)가 만든 데벤테르의 학교에서 공부했고 1486년 아우구스티노 참사수도회에 입회했다. 1492년 사제품을 받은 후 파리대학으로 유학을 갔지만 스콜라 학풍에 젖어 시시콜콜한 추론에만 매달려있는 신학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프랑스와 네덜란드 영국 이탈리아 등지를 다니며 인문주의자와 주교와 제후들과 친분을 쌓으며 신앙의 고전들 연구에 헌신했다.


에라스무스는 많은 작품들을 남겼는데 「그리스도 군인의 소교본」(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 1504)에서 성직자들의 무지와 탐욕, 부패, 미신적인 신심 등을 꼬집은 데 이어 우신예찬으로 잘 알려진 「미련함의 찬미」(Laus Stultitae, 1511)에서는 모든 계층의 부도덕과 모순 특히 고위 성직자들의 교만함과 신앙생활의 폐해 등 교회를 날카롭게 풍자해 비판했다. 또한 성서 원전 연구에도 박차를 가하여 1516년 예로니모의 불가타 라틴어 역본의 오역을 지적한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출판했다.


에라스무스는 이러한 작품들을 통하여 위선과 미신, 교계제도의 폐해, 교회의 형식주의를 배격하고 순수하고 원천적인 복음의 정신에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으며 이를 위한 방법으로 성서와 교부들을 비롯한 초대교회의 저서들에게서 그 원정신을 찾고자 했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신약성서 서문에서 교회 전통들 가운데서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 것들은 과감히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산상수훈에 입각한 생활 즉 복음의 정신대로 살면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폐해는 제거되어야 하지만 신앙의 실체가 침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교회 분열을 통한 개혁이 아니라 용서와 쇄신의 정화를 강조했다. 이 부분이 루터와 비교되는 면이기도 하다. 부패한 교회를 고치는데 회초리가 필요하지만 권위를 파괴함이 없이 순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싸운다는 것은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로 종교를 위한 소란과 혁명, 전쟁은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것으로 확신했다. 에라스무스는 당시의 신앙상태를 어리석음과 광신의 만연으로 보고 참된 지식을 통하여 대중의 비판력을 회복하여 복음의 원정신을 회복해 참된 경건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타성화된 교회 관습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물리적인 힘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개혁파들도 거부한 에라스무스의 이런 중용적 자세는 결국 양측 모두로부터 비난받았다. 성서의 정신에 입각한 개혁정신은 평화로운 개혁을 원하는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양측 비평가들의 혹평에 의해 역사의 뒤안에 머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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