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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63] 라이프치히 토론회

by 세포네 2005.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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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파문
1520년 12월 10일 루터는 수많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회법 책과 교황교서를 불태워버렸다. 이듬해 1월 3일 마침내 가톨릭교회는 그를 파문했다. 사진은 루터홀 안뜰.

 

 

루터, 근본 교리까지 거부

거듭된 교황청의 파문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루터는 1520년 12월 10일 가톨릭교회와 결정적으로 결별을 선언하게 된다. 이날 루터는 수많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회법 책과 교황교서를 불태워버림으로써 이듬해 1월 3일 마침내 가톨릭교회는 그를 파문했다.


이에 앞서 1520년 6월 루터는 라이프치히에서 당시 저명한 신학자였던 에크와 토론회를 갖게 된다. 이 토론회에서는 주로 교황의 수위권 문제와 공의회의 권위 문제가 주된 쟁점으로 다뤄졌다.


에크(Johann Eck, 1486~1543) 신부는 종교개혁에 맞서 당대의 개혁신학자들과의 논쟁에서 가톨릭의 입장을 대변한 신학자이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나 1517년까지 루터와는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 루터의 「95개조 명제」에 대해 비판적인 논평을 가함으로써 루터와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여기에 루터의 비텐베르크 대학 동료인 카를슈타트(A. R. B. von Karlstadt, 1480~1541)가 이 문제에 개입하면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됐다. 카를슈타트는 루터에 대한 에크의 논평에 반대하는 공격적인 문건을 발표했고 이는 그대로 이른바 「라이프치히 토론회」로 이어진다.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6일까지 이어지면서 수없이 많은 논쟁적 문건들이 오고 갔다.

 


신수설과 무류성 거부


루터는 이 논쟁에서 교황권의 신수설(神授說)과 공의회의 무류성(無謬性)을 거부했다. 루터는 교황이나 세계 공의회 역시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오직 성서만이 신앙의 원천이요 기준이라고 선언했다. 「성서만」(Sola Scriptura)을 개혁의 원칙으로 내세우면서 루터는 성서가 읽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해석해주며 성서 자체가 명확하므로 교회의 교도권은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심지어 자신의 친구인 슈팔라틴(Spalatin)에게 이 토론회를 준비하면서 교황 교서들을 연구한 결과 교황이 반그리스도이거나 적어도 반그리스도의 사자(使者)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까지 말한 적도 있다.


에크는 논쟁에서 우선 카를슈타트에 이어 루터와 논쟁을 벌였는데 카를슈타트에 반대해서는 하느님이 인간의 동의를 전제해 의화(義化)를 일으킨다는 것, 그리고 루터에 반대해서는 교황의 수위권이 하느님으로부터 제정됐다고 주장했다.


라이프치히 토론회는 루터에 대한 단죄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토론회를 통해 더욱 명확해진 루터의 입장과 주장을 바탕으로 쾰른대학교와 루뱅대학교의 신학자들은 루터를 단죄했다.

 


국가의 영웅으로 등장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라이프치히 토론회 이후 루터가 국가의 영웅이요 대변인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스스로 교회의 반그리스도를 몰아내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한 루터는 이제 자신의 모든 언사에서 더욱 예언자적 억양이 가미됐다. 또한 당시 시민과 농부들은 루터에 대해 비록 잘 알지는 못했어도 그가 교회와 국가의 혁신을 이뤄줄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사방에서 학생들이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몰려왔고 그의 사상과 주장들은 새로 발명된 인쇄술의 도움으로 쉽게 전파될 수 있었다. 루터는 대중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교회의 부패상을 비판하고 자기 입장을 옹호했다.


1519년과 1520년 사이 루터의 주된 주장들은 교회, 교황과 주교의 전권(專權), 성사, 신앙과 선행 문제들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1520년 「로마의 교황직에 관해」, 「독일 국가의 귀족들에게 고함」이라는 저서를 시작으로 「교회의 바빌론 유배」, 「그리스도인의 자유」 등 일련의 저서들을 통해 자신의 주장들을 펴던 루터는 마침내 교회 쇄신을 넘어 교회의 근본 교리까지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는 독일인의 교황청에 대한 민족적 반감에 호소하면서 교회의 전통 교리와 관습을 공격했다. 「로마의 교황직에 관해」에서 그는 자신의 새 교회관을 내세웠다. 그는 그리스도교는 모든 신자들의 단체인데 이는 볼 수 있는 지상적 단체가 아니라 신앙을 향한 마음 안의 영적 교회라고 주장했다. 교회 안의 계급제도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며 외적 교회 안에만 있고, 예수는 베드로 혼자에게만 천국 열쇠를 준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준 것이라는 등의 주장을 통해 결국 루터는 영적인 교회만이 참교회라고 주장했다.


「독일 국가의 귀족들에게 고함」을 통해 자신의 교회관을 더욱 발전시킨 루터는 △교회 권력이 국가 권력보다 높다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있다 △교황만이 공의회를 정당하게 소집할 수 있다는, 이른바 로마 교황청의 세 가지 장벽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귀족들의 협력을 구했다.

 


“계급은 인간이 만든 것”

 

같은 해 10월에 쓴 「교회의 바빌론 유배」에서는 성사론을 전개한다. 성사는 오직 세례, 고해, 성체성사 뿐이라며 칠성사를 거부하고 다른 성사들은 교황청이 임의로 첨가한 것이라며 성사란 인간 의화의 수단인 신앙을 일으키는 외적 표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특히 루터는 가톨릭 교회가 성체성사를 남용하고 있다며 평신도에게 성혈을 영해주지 않는 것은 로마의 폭정이라고 비난하고 실체 변화와 성체(聖體)로서의 미사를 거부했다.
1520년 2월에 로마에서 심사위원회가 구성됐고 6월 15일에는 레오 10세 교황의 교황교서 「주여, 일어나소서」가 반포돼 루터가 제시한 41개 항의 명제를 단죄함과 동시에 60일 안에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만일 루터가 계속 고집하면 그의 저서들을 불태우고 파문의 벌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루터는 이러한 경고를 완전히 무시한채 그해 12월 10일 비텐베르크의 엘스터 성문에서 학생들과 함께 교회법 책들과 교황교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웠고 이로써 가톨릭교회와의 결별의 수순을 밟았다. 그는 이튿날에는 대학강의 시간에 400여명의 청중 앞에서 자신은 『순교할 각오로 이 반그리스도(교황)와 싸울 것』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교황청은 1521년 1월 3일 루터를 파문하는 교서를 공포했다. 여기서부터 「가톨릭 루터」는 끝나고 「프로테스탄트 루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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