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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101

[28] 서방교회 수도원의 시작과 성베네딕도 베네딕도 성인이 529년에 창건한 몬테카시노 수도원. 베네딕도회의 모원인 이 곳에 성인과 그의 누이 스콜라스티카 성녀가 잠들어 있다.   서방교회 수도원 규칙서 집대성, 동방교회와는 달리 도시속에서 시작 발전 한곳에 머물며 기도-독서-노동 조화이뤄 예로니모는 "나에게 도시는 감옥이고 고독은 낙원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수도승들에게 사막은 고독의 표시이자 하느님만을 생각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절대적인 고독은 절대적인 자유를 낳는 법이다. 세상과의 격리를 의미하는 사막은 거주하는 곳을 떠나는 지리적 사막과 다른 생활 방식, 즉 금욕, 절제, 결혼의 포기와 같은 사회적 사막이 있다. 동방교회에서의 수도생활이 이 두가지 사막의 특징 안에서 철저히 이뤄졌다면 지리적 여건이나 사회적 여건이 달랐던 서방교회는.. 2005. 7. 11.
[27] 수도생활의 시작 시나이산의 심장 가타리나수도원 전경. 유스티아누스 황제때 지어진 것으로 여러나라에 점령당했으면서도 점령자들의 보호로 지금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다.   교회사 100대 사건의 줄기를 따라 방랑도 순례도 아닌 길에서 이집트 시나이산에 이르렀다. 수도생활의 요람인 이집트에서도 보존이 가장 잘되어 있다는 가타리나 수도원을 찾아온 길이었다. 시나이산 초입의 가타리나 수도원. 342년경 헬레나성녀가 시나이산을 순례하고나서 기념경당을 세운 것이 모체가 돼 유스티아누스황제 때 건립된 것이다. 그러나 수도원을 바라보면서 느낀 첫 인상은 수도원의 역사나 외형적 모습이 아니라 무엇이 수도자들을 이 황량한 사막으로 이끌어 냈느냐 하는 내면적인 것이었다. 수도원은 고행수덕생활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복음 선포시기 고신극기를.. 2005. 7. 8.
[26]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선교와 개혁 ◀ 로마의 유적 로마의 멸망을 보고 사람들은 절망했으나 로마를 멸망시킨 이민족들을 개종시킨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활약으로 오히려 그리스도교적 중세사회를 만드는 토양을 만들었다. 고대의 위기 위에 미래 교회 건립 주후 410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영원한 도시 로마가 게르만 부족인 서(西) 고트인들에 의해 약탈되고 파괴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천도이래 제국의 정치적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었지만 로마는 아직도 제국의 상징적 도시였고 서방 교회의 중심이었다. 로마의 이러한 재난은 제국을 혼란에 빠트렸고 많은 이교도들은 로마의 재앙이 로마의 신들을 버리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주장을 거슬러 '하느님의 도시(신국론)'를 저술해 로마의 재앙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이해시.. 2005. 7. 8.
[25] 아우구스티노 신학 신학자요 사목자였던 ‘은총의 박사’ 동방교회가 희랍의 철학적 논리에 근거해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의 교리논쟁에 몰두해 있던 것과 달리 서방교회는 구원론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3세기의 치프리아누스와 떼르뚤리아누스 이후 100여년간 뛰어난 학자를 배출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리스인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던 형이상학적 사색보다는 실천적이고 신자생활에 직접 관계되는 인간 각자의 구원에 대한 윤리실천문제, 자유의지와 죄, 원죄, 은총과 의화 등이 더욱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적 경향은 후에 서구의 신학을 특징짓는 요소들이 된다. 서방의 구원론적 논쟁은 4세기에 이르러 엄격한 윤리주의적 이단인 도나투스 이단과 펠라지우스 이단을 불러 일으켰다. 도나투스 이단은 성사의 인효성을 강조해 "그리스도 .. 2005. 7. 6.
[24] 예로니모와 불가따 성서 해마다 여기서 전세계로 방영되는 성탄자정미사가 봉헌되는데 성당에서 지하계단으로 내려가면 예로니모 성인의 서재가 있다. 대중이 읽기 쉽게 라틴어로 성서 번역, 원문에 충실하고 정확 “교회 공식 성서” 고전강의로 선풍적 인기를 끌던 도올 김용옥은 예수님의 탄생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해산일이 임박한 임산부가 나자렛에서 300여리 떨어진 베들레헴으로 이동해 아이를 낳은 것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신약학계에서는 이미 친숙한 추론이다. 예수 부활이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신봉했는데 베들레헴이 아닌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아가 아니란 반론이 제기 될 것이 분명하기에 복음사가들은 역사적 신빙성이 없는 호구조사까지 만들어 내면서 마.. 2005. 7. 6.
[23] 삼장서 논쟁과 제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성당 제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가 개최됐던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대성당. 1453년부터 500년간 이슬람의 모스크로 사용되다 1935년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황제 단성론 옹호…교황과 관계 단절  ‘죽은 세 주교·저술 단죄’ 큰 반발 불러 성좌권위 떨어지고 동·서방 대립 심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역시 성 소피아 대성당이다. 현존하는 성 소피아 대성당은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 지은 것으로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532년 폭도들에 의해 불타버린 성당을 신축하기 시작, 5년 10개월의 공사 끝에 완공했다. 유스티아누스가 537년 축성식을 거행하기 위해 입장하다 감격해 "솔로몬대왕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라고 외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완공 후 1000여년 동안은 .. 2005. 7. 6.
[22] 강도회의와 칼체돈공의회 ◀= 칼체돈공의회가 열렸던 성녀 에우페미나 성당에는 하이다르파사 기차역이 세워져 수천 수만명의 이슬람 교도들이 메카와 메디나로 순례를 떠나는 시발역이 됐다. 독일의 벨테 신부는 "교의의 역할은 복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알아듣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교의는 예수를 바라보며 예수를 근거로 삼아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말인즉 교리라는 것은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을 설명해 주는 것이지 그 자체가 강조돼 주객이 전도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신앙교의를 정립한 초대교회의 공의회들을 둘러보면서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차이로 인한 신앙해석으로 시작된 교의논쟁들이 심심찮게 올바른 예수이해를 위한 대화의 장이 되기보다 자신들의 정당성을 관철하기 위한 대결의 장이 되고 있음을 되새겨 보지 .. 2005. 7. 6.
[21] 네스토리우스 이단과 에페소 공의회 에페소는 바울로 사도가 3차 전도여행시 27개월간이나 머물며 대대적으로 선교했고 사도시대 교회들 중 가장 규모가 컸었던 공동체였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에페소에는 사도 요한과 루가의 무덤, 성모님께서 말년을 보내셨다는 성모 마리아의 집, 성요한성당, 성모성당 등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있다.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성모께 봉헌된 첫 번째 성당인 에페소의 성모성당은 성모님께서 요한사도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옮겨와 살던 곳으로 431년 제3차 보편 공의회인 에페소 공의회가 열린 곳이다. 그리스도론 논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인성과 신성이 결합되어 있는가?" 이 질문은 325년의 니체아 공의회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하여 삼위일체론이 정리되고 난 후 교회의 최대 관심사를 표명한 것이다. 성자.. 2005. 7. 6.
[20]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81년 제1차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개최된 성 이레네 성당. 십자가 형태의 이레네 성당은 4세기 초까지 아프로디테의 신전이었다가 성당으로 개조됐다.     터키의 이스탄불은 아시아와 유럽 양 대륙에 걸친 도시이면서 로마시대에는 콘스탄티노플, 비잔틴 시대에는 비잔티움으로 불렸던 역사적 도시로 1923년까지 1600여년 간 이 나라의 수도였으며 동방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동로마제국을 지배하던 리치니우스를 물리치고 제국을 통일하자 제국의 새로운 수도, 신 로마를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는 정치적으로는 귀족과 기득권 층의 끊임없는 음모와 술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고 지리적으로는 방대한 영토의 제국을 통치하기에는 서쪽으로 치우친 로마를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종교적으로도 제국 .. 2005. 7. 3.
[19] 아리우스 이단과 제1차 니체아공의회 “니체아 신경 채택한 최초의 공의회”  재작년 수천여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터키 대지진의 진앙지 '이즈니크' 호수변에 자리잡은 이즈니크는 주민 2만여명의 소읍에 불과하지만 로마·비잔틴 시대에는 꽤 이름난 도시 니체아였다. 로마시대에는 비타니아 속주의 주도였고 십자군 전쟁시에는 4차 십자군에 점령당한 비잔틴 제국의 임시 수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회사 안에서 니체아는 맨 첫번째 공의회가 열렸던 곳으로 유명하다.  325년에 소집된 제1차 니체아공의회는 모든 공의회 중 최초의 공의회이면서 모든 교의논쟁이 발생할 때마다 니체아신경이 정통성의 기준이 될 정도로 가장 중요한 공의회였다. 니체아공의회는 부활대축일의 날짜를 춘분이후 만월 다음 주일로 확정하고 성직자 생활, 교회구조, 공적 참회, 전례문제 등.. 2005. 7. 3.
[18] 밀라노 관용령과 제국교회 “타종교 포함 종교자유 허용” 이탈리아의 경제는 북부 지역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그 중에서도 밀라노는 이탈리아 경제를 이끌고 있는 경제 수도이다. 또한 이탈리아 북서부의 롬바르디아주의 주도인 밀라노는 경제 중심지일 뿐 아니라 역사적 건축물과 박물관, 대학 등으로 둘러싸인 전통의 도시다. 그 중에서도 밀라노의 두오모(주교좌) 대성당은 이탈리아 최대의 고딕 양식 건축물이다. 고딕건축 양식의 특징 중 하나는 뾰족탑이라 부르는 첨탑과 천정을 높게 하는 것인데 이는 하늘을 향한 인간의 소망을 표현하면서 하느님께 사람들을 들어 올린다는 표현의 의미라고 한다. 두오모 광장에서 바라보는 대성당의 위용은 정말 하늘을 향한 인간의 마음이 이런 것이구나 할 만큼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밀라노에서도 모든 중심지는 이 두오모 .. 2005. 7. 3.
[17]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전승 이끈 그리스도를 수호신으로”  성주간이 되면 교황은 순교자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순교자들이 맹수의 먹이가 되어 쓰러져간 콜로세움에서 십자가를 손수메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봉헌한다.  이 콜로세움에서 서쪽으로 1.5㎞ 정도를 가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이 나타난다. 후에 파리 개선문의 모델이 되기도 한 이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가 312년 막센시우스를 물리치고 서로마를 제패한 기념으로 원로원이 건조해 콘스탄티누스에게 헌정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전쟁의 승리후 313년 밀라노에서 동로마의 황제 리치누스와 협정을 맺고 그리스도교의 종교자유를 허용했다.  순교지의 대명사 콜로세움과 순교의 승리를 보여주는 듯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함께 바라보고 있노라면 남다른 신앙의 감동이 전해져 오는.. 2005.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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