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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53] 교황권의 쇠퇴와 교서 ‘우남상탐’

by 세포네 2005.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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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틀담 대성당
파리의 노틀담 대성당. 필립4세가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공의회 소집에 맞서 프랑스 최초의 삼부회의를 개최한 곳이다.

 

 

그리스도교적 서구사회 해체
성직자 투옥.십일조 부과로 교황과 갈등
왕권 강화로 교황권의 우위성 쇠퇴 기미

유럽의 오래된 도시 이름을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보인다. 독일에서는 000부르그(-burg) 영국에서는 000버러(-bourg) 프랑스에서는 000부르(-bourough)라는 도시이름 뒤에 붙는 접미사다. 이는 중세 도시들을 부르는 말로 성읍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그 도시민들을 부르주아라고 불렀는데 시민이라는 뜻으로 통용됐다.


상공업을 통한 도시의 부활과 발전은 엄청난 사회적 변혁을 가져왔다. 도시의 발달과 함께 화폐경제가 급성장했는데 이는 토지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부의 형태를 바꾸어 놓았다. 따라서 귀족은 여전히 사회적 지배력을 행사했지만 토지를 바탕으로 한 부와 사회적 지위가 불안해졌다. 귀족들은 농업을 상업적으로 운영하기도 했으며 기업가로 변신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또한 부의 격차가 벌어짐으로써 전통적인 귀족의 기반이 무너져 귀족들의 계층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당시 강력한 중앙집권화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군주들은 도시의 발달로 강력한 사회세력으로 떠오른 시민계급을 옹호함으로써 귀족들의 사회적 기능을 약화시켰다.


이리하여 강력한 교황권 아래 단순한 영주권으로 격하됐던 종래의 국가들이 상대적으로 왕권이 강화된 중앙집권적 군주국가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교로 통일된 서구 공동체의 해체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해체과정은 자연 교황권과 왕권의 갈등으로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보니파시오 8세 교황과 프랑스의 필립 4세와의 다툼이었다.


교황권과 독일 황제의 다툼 속에서 황제권은 크게 약화됐다. 특히 슈타우펜 왕가의 콘라드 4세 사망 후 합스브르크 왕가가 들어서기까지 황제가 선출되지 못하던 시기(1254~1273 Great Interregnum)동안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교황권도 이 시기를 유용하게 보내지 못했다. 교황에 의한 세계지배 이념에 심취한 나머지 시대적 징표를 읽지 못하고 세속적 목적을 위해 파문과 같은 영적인 무기들을 남용했다. 반면 황제권의 약화는 서방 군주국가들에게는 크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왕들은 당시 일어나고 있던 인문주의적 사상과 맞물려 교회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지식세력과 함께 점차 중앙집권적 통치기구들을 설치하면서 군주국가로의 입지를 굳혔다.

 


시대적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어느때 보다 교회는 보다 종교적인 교황을 필요로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완고하고 매우 정치적인 보니파시오 8세가 1294년 교황이 됐다.
교황과 필립 4세의 갈등은 두 시기로 나눠지는데 첫 갈등은 성직자들에 대한 과세 문제였다. 영국과의 백년전쟁으로 많은 전비가 필요했던 필립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교황의 동의 없이 성직자에게 과세를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십일조를 부과했다. 이에 교황은 1296년 교서 「재속사제에 고함」을 발표하고 이에 응하는 군주들을 파문한다고 위협했다. 이에 필립은 로마와의 모든 교역을 중단시켰고 법학자들을 동원해 왕권의 절대권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새로 성장한 시민계급들도 왕권을 지지했다. 프랑스와의 무역에 많은 수입을 의존하던 교황청은 곤궁에 빠졌을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반대자들에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교황은 결국 한발 물러서 1297년 왕의 필요시 과세를 인정했으며 화해의 표시로 필립의 할아버지인 루이 9세를 시성했다. 그리고 교황은 1300년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성년을 반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를 순례하게 함으로써 실추된 권위를 어느정도 회복하는 듯했다.


그러나 1301년 필립이 교황권의 절대적 지지자였던 파미어(parmiers)의 주교 베르나르도를 반역으로 고발해 감옥에 가둠으로써 새로운 갈등이 야기된다. 이 같은 필립의 왕권 강화와 교회 내정 간섭에 교황은 왕을 파문으로 위협하면서 로마에서 프랑스 교회를 위한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를 방관하면 권좌가 흔들릴 것으로 생각한 필립은 주교들에게 공의회 참석을 금지 시키고 1302년 4월 파리의 노틀담대성당에서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삼부회의를 소집했다. 귀족, 성직자, 시민계급으로 이뤄진 회의에서 필립은 프랑스 왕의 독립과 세속사에 있어서의 왕의 종주권을 선언했다. 공의회를 통해 목적을 이루지 못한 교황은 1302년 11월 교서 「거룩한 하나의 교회」(우남상탐 Unam sanctam)을 발표한다.


보니파시오 8세는 이 교서를 통해 교회의 단일성을 강조하며 세속적 권력은 영적인 것에 종속되므로 그리스도교 국가의 단일체 안에서 최고의 판결권은 교황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회와 국가가 동시에 우월하고 독립적이라는 관념은 마니교적 이단이라면서 거부했다. 세속적인 권력까지 포함하는 절대권을 주장하면서 신정정치를 꿈꾸었던 것이다.
이 교서를 접한 필립은 교황도 부도덕할 경우 공의회에서 심판받아야 한다면서 교황에게 전임 교황권 찬탈, 성직매매, 이단, 독성죄 등의 죄목을 부과해 1303년 아나니의 교황궁에서 왕을 파문할 준비를 하고 있던 교황을 체포했다. 갖은 수모 끝에 교황은 시민들에 의해 구출되었지만 큰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한달 뒤 선종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곧 교황권의 끝없는 추락을 의미했다. 이어진 교황의 아비뇽 유폐, 대립교황으로 인한 서구대이교, 공의회 우위설, 세속화된 교황의 연이은 출현 등은 교황직의 보편적이고 중세적인 우위성의 종말을 말해준다.


교황권의 쇠퇴는 당시 인문주의 사상과 결합해 새로운 정치원리를 이끌어낸다. 1313년 파리대학의 총장이었던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는 「평화의 수호자」(Defensor Pacis)라는 저서를 통해 권력의 기초를 민중에 둔 민중사상(Lay spirit)을 주장했다. 그는 국가는 모든 시민들의 전체 집합이고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전체 집합으로 보았다. 따라서 국가 안에 존재하는 교회는 국가 구조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도 사제이며 사회의 한 시민인 사제도 모든 사회법규에 구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의 청빈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마르실리우스는 교회는 가난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가 교회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야 하며 교회가 가난해지면 권력이 없어지고 자연 국가의 지배를 받게 된다고 주장했다. 전체주의 사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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