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64] 보름스 제국의회

by 세포네 2005. 10. 29.
728x90

<=   보름스제국의회
1521년 4월 루터는 황제 앞에 소환되어 자신의 신앙과 행동을 변호해야만 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해 하루의 말미를 얻은 루터는 4월 19일 의회에서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취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루터, 끝까지 ‘취소 불가’ 주장

1521년 1월 3일 파문된 루터는 이후 다시 한 번 자신의 주장을 취소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알 5세(1519~1556)는 1월 27일부터 보름스(Worms)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루터의 국외 추방령을 선포하려 했으나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루터 문제를 의회에서 심사하도록 요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의회로부터 출두령을 받은 루터는 4월 16일 보름스에 도착해 다음날 황제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해 하루의 말미를 얻은 루터는 4월 19일 의회에서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변론하고 성서에 의거해서 그것이 오류라는 명확한 증명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결코 취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의회 결정에 따라 황제 카알 5세는 5월 8일 칙서(보름스 칙령)에 서명하고 25일 공포했다. 칙서는 루터의 법익(法益)을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하며 그의 저서를 전파하는 자들도 처벌하는 내용이었으며 그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추방한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제후들이 이미 모두 귀향한 뒤여서 칙령의 시행은 결정되지 못했다.
어쨌든 이처럼 루터와 그 주장을 따르는 이들에 대한 단죄가 결정됨에 따라 루터는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제후 프리드리히는 4월 26일 보름스를 떠나 비텐베르크로 향하던 루터를 보호하기 위해 납치를 가장해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은밀하게 숨겨두게 했다.


프리드리히의 배려로 몸을 피하게 된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에서 1522년 3월 6일까지 머물게 되는데 이곳에서도 그는 바깥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개혁 저서들을 수없이 저술했다.


그는 성모 찬미가(Magnificat)의 주해서를 쓰고 구약 시편 주석도 시작했다. 찬미가 주해서에서 그는 성모에 대한 자신의 열렬한 신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루터는 「미사의 오용」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해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수도자들에게 사제직과 주교직이 비성서적 요소를 담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미사를 거부하도록 했다. 성직자의 독신생활은 원래 자발적 선택의 문제였는데 교회법에 의해서 강요된 의무로 바뀌었다고 비판했다. 「수도 서원」을 통해서는 수도자의 서원이 하느님의 계명인 사랑, 특히 자녀의 부모 사랑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수도생활과 서원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인간의 복음적 자유를 속박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종신서원 이후라도 언제든지 수도생활을 떠날 수 있는 인간의 근본적 자유가 있고 이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라고 주장했다.
그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루터의 개혁 사상을 따르는 무리들이 벌써부터 루터의 이론을 직접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미사를 없애고 신부들은 결혼을 하고 수도자들은 수도원을 뛰쳐나왔다. 루터 추종자들은 비텐베르크 곳곳에서 매우 과격하고 극단적인 설교를 일삼았고 이로 인해 큰 혼란이 이어졌다.


1521년 10월 비텐베르크 성채 성당의 대부제인 칼스타트는 성직을 포기하고 양형 영성체를 도입하면서 성화상 공경을 공격했다. 성탄절에는 제의도 입지 않고 세속 옷을 입은 채 신자들에게 성혈을 영해주었다. 루터와 같은 수도회 수사였던 쯔빌링은 미사와 수도생활을 강하게 반대하는 강론을 하면서 수도자들이 집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고 미사는 제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비텐베르크의 학생들과 주민들은 성화상을 파괴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를 폭행했으며 루터의 「수도 서원」에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 수도자들은 속속 수도원을 떠나고 일부 지역에서는 성직 포기와 환속이 뒤따랐다. 급기야 1522년초 츠비카우(Zwickau)에서 일부 급진파들은 자신들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세상 종말이 다가왔다고 주장하는 등 혼란이 극에 달했다.


1522년 3월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여전히 옛날 수사복을 입고 머리는 삭발한 채 매일 성당에서 강론을 하면서 자신이 처음 시도한 복음적 자유를 오용해 새 법을 만들려고 하는 거짓 개혁자들을 질책하면서 「약한 양심의 신자들을 고려해서 함부로 개혁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그는 미사 제의도 다시 도입하고 후에 자신이 신부 개인 미사의 관례를 없앨 때까지는 옛날 교회의 의식 그대로를 보존하려고 했다. 그러자 칼스타트는 루터를 「새 교황」이라고 공격하면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결국 루터는 자기가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신앙의 원천이며 그리스도교 신자는 복음적 자유를 누리고 있으므로 성경을 통해 직접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주장했으나 다른 개혁자들이 각자 나름대로의 개혁을 시도하자 이를 거짓 개혁이라고 공격한 셈이다.


1524년 독일 남서부 지방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이 살인과 방화 같은 과격한 행동으로 나타남에 따라 루터는 사회 질서 회복을 위해 제후들의 무력 진압을 요청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민중 중심의 종교 개혁이 이제는 세속 군주 주도의 종교 개혁으로 변질됐고 농민의 패배로 끝난 농민 전쟁으로 인해 루터는 보름스 제국의회 이후 누렸던 대중적 지지를 상실하게 된다.


독일에서 이어지던 교회 문제는 정치 쟁점화되어 제국의회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1526년 열린 제1회 스파이어(Speyer) 제국의회에서 황제는 공의회 소집까지 보름스 칙령의 시행을 유보하고 종교 문제의 결정권을 루터를 후원하는 제후들에게 위임하기로 잠정 결정했다. 이에 따라 작센과 헷세(Hesse)에서는 새 교회령이 반포돼 국교회 형태의 연방 교회가 형성됐고 가톨릭 성직자들이 추방됨으로써 이 지방들은 신교화(新敎化)됐다.
하지만 1529년에 열린 제2차 스파이어 제국의회에서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루터파의 교회 개혁을 중지하고 보름스 칙령을 시행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대해 신교파 제후들은 격렬하게 항의(Protest)했고 이때부터 그들을 프로테스탄트로 부르게 됐다.


1525년 5월 루터의 후원자였던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사망한 뒤 종교 개혁의 주도권은 작센의 제후에게서 헷세의 백작 필립에게로 옮겨졌고 필립공은 1529년 10월 1일 루터와 츠빙글리 양측 신학자들을 마르부르크로 초대, 신학적 대화를 나누게 해 「마르부르크 조항」 15개 항 중 성체의 현존에 관한 항을 제외한 14개항에 대해 의견일치를 봤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