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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한국교회사80장면80

(8) 1960년 가톨릭 학생 총연합회 전국 대의원 대회 학생운동의 진로 연구 이론보다 ‘실천’강조 “전국학생 대의원대회 盛了 - 진리 정의 立脚하여 自己確立하라. ‘현사회와 대학교육에 따른 가톨릭학생운동의 진로(進路)’를 대회 스로강(슬로건)으로 삼고 무더운 한여름도 쉬지 않고 ‘주의영광’을 현양하는 방도를 묘색하려는 대한 가톨릭의 학생들은 五일간의 대회 동안 분과위(分科委) 등을 통한 진지한 연구 끝에 ‘이론에서 실천으로 매진할 것’을 결의했다. 특히 이번 대회는 고등학생들의 ‘천주를 위한 사업’에 적극 활동할 것을 촉구하기 위해 ‘전국고등학생 가톨릭연합회’를 다음 대회때가지 결성하기로 결의하고 그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가톨릭시보 1960년 8월 14일자 1면 중에서) 1960년 8월 4일부터 8일까지 대구 효성여자대학에서는 대한 가톨릭 학생총연합회 ‘.. 2006. 7. 16.
(7) 1959년 ‘경향신문 폐간 사건’ “민주 수호의 선봉 가톨릭 일간지 뜻하지 못한 폐간 당해” “政府의 雅量있는 再考를 要望한다. - 京鄕新聞의 廢刊措置에 대하여 政府當局은 지난 四月三十日밤 열時를 지난 京鄕新聞社에 對해 ‘軍政法令 第八十八호를 적용하여 發行許可를 取消’한다는 통지서를 보냄으로서 廢刊措置를 취하였는데 이 한쪼각의 통지서로 인하여 이 나라가 自由를 얻은 이듬해인 一九四六年十月六日에 復刊된 이래 十三年間 다른 어떤 新聞에 못지않게 民主主義를 守護하는데 熱烈하였으며 民國의 樹立과 反共戰線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기고 發行部數 二十萬數千部를 헤이게되어 한국에서 둘째가는 大新聞의 지위를 찾이해온 가톨릭의 日刊紙는 紙齡 제 四三二四호를 마지막으로 뜻하지 못한 죽음을 當한 것이다.“(가톨릭時報 1959년 6월 10일자 1면 사설 중에서) .. 2006. 7. 16.
(6) 1957년 ‘한국에 주교 삼위 동시임명’ 전주·광주 대목구 승격 부산은 독립교구로 설정 “釜山(代牧)敎區設定 監牧에 崔在善師 全州 및 光州敎區도 代牧區로 昇格" 敎皇聖下께서는 三月七日 지금까지 知牧區(Predfect Apostolic)였던 韓國의 全州敎區(全北地區)와 光州敎區(全南地區)를 代牧區(Vicars Apostolic)로 昇格시키는 한편 現在까지 大邱敎區 管下의 監牧代理區로 있던 慶尙南道地區를 獨立敎區(代牧區)로 설정한다고 發表하심과 同時에 以上 三敎區의 主敎를 任命하셨는데 卽 ‘발도로메오’ 金賢培 現敎區長을 全州敎區監牧에 昇格시키고 ‘아그비아’ 主敎의 名儀를 賦與하며 光州敎區監牧에 ‘하로ㄹ드 헨리‘(玄) 現敎區長을 승진시키고 ‘코리다라’ 主敎의 名儀를 賦與하며 또한 新設되는 釜山敎區(慶南地區)의 監牧으로는 現大邱敎區 主敎座敎會主任神父 .. 2006. 7. 16.
(5) 1955년 ‘당대의 지성 육당 최남선의 개종’ 가톨릭 신앙의 핵심 언급 개종 당위성과 명분 설파 “나는 왜 가톨릭에로 改宗하였는가 - 六堂 崔 베드루 南善 … 대개 가톨릭은 人類文化의 宗敎分野를 擔當한 ‘이스라엘’ 民族으로 말미암아 啓示되고 鍊마되고 完成된 敎門에 希랍의 哲學과 羅馬의 組織力과 乃至 近至思想의 精華까지가 融會 合.. 2006. 6. 16.
(4) 1949년 ‘대한 천주교 총연맹 결성’ “교구대표자 七十여명 회동 최고 최대의 단체 결성…” “大韓天主敎總聯盟結成 서울교구 연합청년회의 주최로 八월 二十二일부터 동 二十六일까지 가톨릭 하기대학강좌를 열었고 이를 기회로 하여 동 二十六일 오후 二시에 서울 명동대강당에서 천주교총연맹을 조직하였다. 서울교구를 비롯하야 각교구대표자 七十여명이 회동하야 전국적 최고 최대의 단체 대한천주교총연맹을 결성하게 된데 대하여서는 총재 노주교각하의 열열하신 지도와 서울교구 유지제씨의 분투노력의 결과로 우리는 깊이 감사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연맹의 탄생을 축복하며 그의 발전을 기대하여 마지 않는다”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된 1945년 8월 15일은 ‘성모승천대축일’이었다. 한국교회는 해방의 기쁨을 민족과 함께 나누었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민족의 해방을 주보인 성모님.. 2006. 5. 15.
(3) 1933년 ‘서울대교구장 뮈텔 대주교 선종’ “경탄하고 애통하온 말삼 대중은 엇지 다하오릿가” “謹 근 悼 도 故 고 閔大主敎 閣下 각하 지난달 二十三일 오전에 우리는 대주교각하의 서거하옵신 부음을 듯자왓나이다 각하의 옷깃에 어린양가치 무럭무럭 자라나는 十여만대중은 경탄하고 애통하온 말삼 엇지 다하오릿가/생각하옵건대 각하께옵서 우리반도에 처음 나오실때는 군난의 험한 풍운이 아직도 살아지지 아니한 거츨은 황무지 뿐이엇나이다/수업는 희생자의 피로써 세례를 바든 반도의 강산은 아직도 깊히 든 잠을 깨지못하고 악마의 손이 주야로 침노하고 있엇나이다/각하께옵서는 얼마나 쓰린 고초를 당하셧나잇가/그러나 주의 은총이 이 땅에 풍성히 나리고 조상의 공적이 헛되지 아니하야 신교(信敎)의 자유가 허락되엇스매 각하에 마음도 다소간 안심은 어덧사오리다.../각하여 천국.. 2006. 5. 15.
(2)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이날을 긔념하고 축하… 다같이 즐겨용약하라” “宣선 傳전 文문 三천리강산 이땋에 진리의 빛 천주의 복음이 전한지 一백四十八년이오 조선교구가 설정된지 백년이다. 우리는 이날을 긔념하고 축하하며 천주의 진리를 四해에 외치노니 모든이는 다 같이 즐겨용약하라. … 거금 백년전에 비로소 로마 교황청의 재가로써 정식으로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전교회가 이땋에 권교할 책임을 맡앗으니 그때의 신자수효는 六천명이엿다.” ‘天主敎會報’ 1931년 10월 1일자 1면에는 ‘祝朝鮮敎區設定百週年記念’이라는 커다란 제목 밑에 복음이 조선 땅에 전해진지 100년을 기념하는 경축과 새로운 다짐의 글이 실렸다. 그로부터 100년전인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792년 이래 북경교구장 주교의 개인적 보호와 지.. 2006. 5. 15.
(1)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사 80장면 시대적 역경 딛고 아시아 복음화 주역으로 해외원조·선교소명·생명운동 등 활발히 전개 민주화운동·인권수호 등 예언자적 소명 실천 90년대 들어 냉담자 증가, 질적성숙 절감 때는 민족에 대한 혹독한 억압의 시기였던 1927년 4월. 한 줌의 평신도들이 뜻을 모아 한국 가톨릭 언론의 씨앗을 뿌렸다. 비록 그 처음은 보잘 것 없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 씨앗은 이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어 바야흐로 80주년의 역사적 시기를 앞에 두고 있다. 한국 가톨릭 언론의 대명사라 할 가톨릭신문의 창간은 척박한 교회 문화의 토양을 기름지게 할 밑거름이었다. 교회와 함께 해온 가톨릭신문 79년 때마침 가톨릭신문의 창간과 그 79년의 역사는 유례 없는 격동기였던 한국 근현대사 1백년과 궤를 같이 했다. 박해의 터널.. 2006.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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