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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한국교회사80장면

(2)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by 세포네 2006.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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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1931년 10월 1일자 1면.

“이날을 긔념하고 축하… 다같이 즐겨용약하라”

“宣선 傳전 文문

三천리강산 이땋에 진리의 빛 천주의 복음이 전한지 一백四十八년이오 조선교구가 설정된지 백년이다. 우리는 이날을 긔념하고 축하하며 천주의 진리를 四해에 외치노니 모든이는 다 같이 즐겨용약하라. …

거금 백년전에 비로소 로마 교황청의 재가로써 정식으로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전교회가 이땋에 권교할 책임을 맡앗으니 그때의 신자수효는 六천명이엿다.”

‘天主敎會報’ 1931년 10월 1일자 1면에는 ‘祝朝鮮敎區設定百週年記念’이라는 커다란 제목 밑에 복음이 조선 땅에 전해진지 100년을 기념하는 경축과 새로운 다짐의 글이 실렸다.

그로부터 100년전인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792년 이래 북경교구장 주교의 개인적 보호와 지도에 맡겨져 북경교구에서 그 사목적 보살핌을 받아오던 조선에 독립적인 교구, 정확하게는 조선대목구를 설정했다. 그 후 100년 뒤인 1931년 한국 교회는 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게 됐던 것이다. 교구가 설정된 이후 조선교회는 모진 고난 속에서도 꾸준한 성장을 계속해왔다.

‘선전문’이라는 제목으로 교구설정 100주년의 기쁨과 미래를 향한 다짐을 적은 ‘天主敎會報’는 이런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꽃피운 조선교회의 처지를 이렇게 말했다.

“오호라 악마의 작난이 심하여 신자의 자유와 재산은 여지없이 짓밟히고 악마의칼날에 생명은 아츰 이슬같이 살아젓으니 긔해 병오 병인년의 三대학살시에 순교의거륵한 피를 흘린자 무려 수만명이엿다. 그들의 철석같이 굳은 신앙 불꽃같이 열열한 정신은 조곰도 굴하지 않고 선혈로 이땋을 세례하엿다. 정의는 필승이라 우리의 조상이 목숨을 바처 전해준 복음의 씨는 一八八二년 이후 비로소 신앙 자유를 얻어 봄바람을 마지하엿으니 그때의 신자수효는 一만二천명이엿다. 그후 五十五년을 지난 오늘에 十二만의 신자를 얻엇고 교구는 경성 대구 원산 평양 연길의 다섯으로 난호엿으며 모든 시설과 사업이 날로 륭창하여가고 있다.”

이날 ‘天主敎會報’는 ‘선전문’이 실린 1면 외에 4면 마지막 면에서 1931년도 조선교구의 교세 통계(1030년 5월 1일부터 1931년 5월1일까지)를 상세하게 도표로 만들어 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경성, 대구, 원산, 평양, 연길 등 5개 교구에 주교가 6명, 외국인 신부 95명, 조선인 신부 75명, 외국인 수사 29명, 조선인 수사 7명, 외국인 수녀 37명, 조선인 수녀 166명이다. 또 성당은 279개에 공소가 1351개이고, 신자 총수는 11만 6694명이고, 예비신자만 7659명에 달했다. 냉담신자의 수도 통계가 나와 있는데 총 3168명으로 집계됐다.

선전문은 이제 1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아야 하는지를 아래와 같이 당부했다.

“이제 우리 조선교구 창설 백주년긔념날을 당하야 만천하 인사에게 고하노니 우리에게 전하여진 이 그리스도의 졍신 카톨릭 정신이야말로 사람으로써 반듯이 가질바 정신이오 행할바 바른길이다. 一세긔에 뻗치인 우리 조선 성회사(聖會史)가 무엇을 가르치며 三억여만 대중의령이 한등이로 一치되는 세계적 최대종교 천주교(카톨릭)는 무엇을 깨닫게 하는가. 형제여 오늘의 이 깃븜이 영광이 다만 우리들 천주교인에게만 국한한 깃븜과 영광이 아닌줄 알자. 그리고 참되히 살아가기 위하야 바른 길을 찾아 나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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