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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한국교회사80장면

(3) 1933년 ‘서울대교구장 뮈텔 대주교 선종’

by 세포네 2006.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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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1933년 2월 1일자 1면.

“경탄하고 애통하온 말삼
대중은 엇지 다하오릿가”

“謹 근 悼 도 故 고 閔大主敎 閣下 각하
지난달 二十三일 오전에 우리는 대주교각하의 서거하옵신 부음을 듯자왓나이다

각하의 옷깃에 어린양가치 무럭무럭 자라나는 十여만대중은 경탄하고 애통하온 말삼 엇지 다하오릿가/생각하옵건대 각하께옵서 우리반도에 처음 나오실때는 군난의 험한 풍운이 아직도 살아지지 아니한 거츨은 황무지 뿐이엇나이다/수업는 희생자의 피로써 세례를 바든 반도의 강산은 아직도 깊히 든 잠을 깨지못하고 악마의 손이 주야로 침노하고 있엇나이다/각하께옵서는 얼마나 쓰린 고초를 당하셧나잇가/그러나 주의 은총이 이 땅에 풍성히 나리고 조상의 공적이 헛되지 아니하야 신교(信敎)의 자유가 허락되엇스매 각하에 마음도 다소간 안심은 어덧사오리다.../각하여 천국에서 우리의 조상들과 한가지로 우리들 어린양을 굽어보시고 기리보호하심을 간구하여주소서/우리에게 의자가 되고 용병이 되는 은총을 풍성히 밧게하여주소서”

‘천주교회보(天主敎會報)’ 1933년 2월 1일자 1면에는 뮈텔 민대주교의 부음을 알리는 소식이 전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으로 제8대 조선 대목구장, 제8대 서울대목구장으로서 한국 이름은 민덕효(閔德孝). 본명은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Gustave-Charles-Marie Mutel, 1854~1933)로서 1877년 사제로 서품되는 동시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돼 오랜, 그리고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1880년 11월 황해도 장연에 상륙해 인근의 한 교우 옹기촌에서 몸을 숨김으로써 조선땅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근 50여년이 넘도록 머나먼 동방의 땅 조선에서 단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사목활동에 힘썼다.

천주교회보는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깊은 애도와 경탄의 마음으로 조선인을 위해 살았던 한 위대한 주교, 파리외방전교회와 한국교회가 낳은 한 역사적 인물을 기리고 있다.

여전히 박해와 억압의 서슬이 퍼렇던 당시 선교사로서 이 땅에 발을 디딘 그에 대해 천주교회보는 “얼마나 쓰린 고초를 당하셧나잇가”라며 그 노고를 치하하고 이제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로 가지만, 조선 땅에 믿음의 자유가 허락되었음에 이제는 마음을 놓으시고 하늘에서 조선 땅의 어린 양들을 위해 전구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천주교회보는 이어 민대주교의 유언 전문을 그대로 싣고 있다. 이 유언서는 민대주교가 친필로 쓴 것을 발견한 뒤 감격에 넘치는 마음으로 공개하는 것이었다.

“이는 나의 유언이라
나의 사랑하온 모친 동정 마리아의 손으로써 내령혼을 천주께 바치고 나 1평생에 로마 성교회의 신덕을 위하야 죽기를 원하고 또 이 신덕으로 항상 살엇거니와 이제 이 신덕을 밧들고 죽노라/나의 생명이 비록 미소한 것이나 조선인의 구령함을 위하며 또한 조선 지방에 카톨릭교가 전파되기를 위하야 감심으로 내 생명을 바치노라

천주 나를 조선지방전교신부로 차정하여 주심을 감사하오며 또 나를 두 번재 조선에 부르심을 감사하오며 또 조선에 이러틋이 오래 머물러 두신 막중한 은혜를 감사하나이다/…

모든 신부와 모든 수녀와 모든 교우들에게 나 혹시 조치 못한 표양을 준것이 잇엇스면 용서하여 주시기를 청하노라/내가 부러 하지는 아니하엿지마는 혹시모르는 사이에 저들의 마음을 상한것이 잇스면 또한 니저바려주기를 청하노라, 저들이 혹시내게 잘못한것이 잇스면 나는 발서부터 진심으로 다 용서하여 주엇노라

모든이 피차 서로 애덕의 사슬로써 결합하기를 간청하노니 이 애덕의 사슬은 조선 모든 신부들을 항상 결합케 하엿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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