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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한국교회사80장면

(1)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사 80장면

by 세포네 2006.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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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과 함께 새 교황을 맞은 보편교회안에서 한국교회는

시대적 역경 딛고 아시아 복음화 주역으로
해외원조·선교소명·생명운동 등 활발히 전개
민주화운동·인권수호 등 예언자적 소명 실천
90년대 들어 냉담자 증가, 질적성숙 절감

때는 민족에 대한 혹독한 억압의 시기였던 1927년 4월. 한 줌의 평신도들이 뜻을 모아 한국 가톨릭 언론의 씨앗을 뿌렸다. 비록 그 처음은 보잘 것 없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 씨앗은 이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어 바야흐로 80주년의 역사적 시기를 앞에 두고 있다. 한국 가톨릭 언론의 대명사라 할 가톨릭신문의 창간은 척박한 교회 문화의 토양을 기름지게 할 밑거름이었다.

 

 


교회와 함께 해온 가톨릭신문 79년

때마침 가톨릭신문의 창간과 그 79년의 역사는 유례 없는 격동기였던 한국 근현대사 1백년과 궤를 같이 했다. 박해의 터널을 지나 신앙의 자유를 얻은 한국교회는 그 가쁜 숨을 고르기도 힘겹게 일제의 탄압 속에서 민족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해방의 만세를 부르던 그 순간 우리 민족은 둘로 나뉘어 상대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을 맞았고, 외세에 의해 강요된 분단, 허리가 잘린 조국에서 교회는 다시금 민족을 억압하는 독재와의 투쟁에 나서야 했다. 그것은 민족적 소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목청껏 부르짖어야 하는 예언자적 소명이기도 했다.

그 험난한 고난과 역경의 와중에도 한국 천주교회는 끊임없는 발전과 성장을 거듭해 이제 세계교회 안에 명실상부한 지역교회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추기경이 탄생해 최근 교황 베네딕토 16세로부터 서임됨으로써 복수 추기경 시대를 맞이하고, 아시아 복음화의 첨병이자 거점으로서 보편교회 안에서 제 몫을 다하게 됐다.

1927년 월간 ‘천주교 회보’에서 시작된 가톨릭신문은 가톨릭신보, 가톨릭시보, 다시 가톨릭신문으로 불리며 민족과 교회와 함께 영욕을 함께 함으로써 한국 근현대 교회사의 산 증인이 되었고, 이제 80주년을 앞두고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불철주야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성서적 의미를 지닌 창간 80주년을 한 해 앞두고 가톨릭신문은 지난 79년, 다가올 1년을 보태 총 80년 동안 가톨릭신문을 통해 한국교회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성찰하는 기획을 마련한다.

80주년에 맞춰, 교회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총 80개의 장면들을 되돌아보고 다시금 성찰함으로써 우리는 지나간 80년이 오늘의 한국교회에, 그리고 내일의 한국교회에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 79년의 회고

이에 앞서 우리는 한국 교회의 역사, 특히 가톨릭신문이 취재하고 보도했던 지난 80년의 한국교회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일제시대

가톨릭신문이 ‘천주교회보’라는 이름으로 창간되던 당시, 1927년은 당시 민족 전체의 문맹률 80%, 천주교 신자의 수적 열세, 교구의 교세 등을 감안할 때 만용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국교회는 1895년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19ㅠ10년 한일합방까지 연평균 7%에 이르는 교세 성장률을 보였지만 이후 해방 전까지 신자 증가율은 2.73%로 급락했다. 이는 일본의 억압에 크게 기인했다.

1931년에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는데, 당시 교회 문화운동의 활력은 돋보이는 것이었다. 여러 잡지들이 창간됐는데, 이후 1933년 기존 잡지들이 통폐합된다.

분단시대와 한국교회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고 교회는 해방된 민족에 대한 봉사를 다짐하며 선교활동 뿐만 아니라 사회사목활동을 통한 간접 선교에 주력했다. 청년운동과 가톨릭액션이 본격화됐다. 하지만 북한교회는 혹독한 탄압을 맞게 되고, 많은 교회 인사들이 투옥됐으며, 한국전쟁 직전에는 성직자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단행됐다.

한국전쟁은 교회에 큰 타격을 입혔다. 전쟁 동안 교회는 많은 성직자, 수도자와 지도급 신자들을 잃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한국교회는 고통을 극복하자는 독려와 함께 멸공,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분위기가 됐다.

외국교회의 지원은 한국 사회와 교회의 재기에 큰 힘이 됐다. 활발한 구제 사업은 성당 건립과 사회사업, 교육사업이 활기를 띠게 했고, 이는 직접적으로 신자증가율에 영향을 미쳐 50년대 신자 증가율은 무려 16.5%에 달했다.

전후 사회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각종 교회 단체들도 활력을 되찾았다. 지식인들의 개종도 잇달았다.

교회 쇄신과 사회 정의 실현
- 시대의 고난을 민족과 함께

1962년 한국교회에는 정식으로 교계제도가 설정됐다. 그해 10월 개막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한국 현대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교회는 공의회를 통해 전환기의 자기 위치를 성찰하고 민족과 교회를 위한 쇄신과 봉사의 자세를 점검했으며, 이는 이후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운동, 종교간 대화에도 큰 영향을 준다.

교회의 내적 쇄신과 일치라는 공의회의 가르침은 교회 일치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고, 평신도를 자각하게 했다. 무엇보다 공의회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일깨웠고, 이는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북돋았다.

60년대와 70년대 신자 증가율의 하락은 교회의 선교 정책에 일대 전환을 요구했고, 때마침 사회 정의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공의회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거세게 촉발됐다. 이제 교회는 사회정의와 인권 수호를 위한 사회참여가 시대적 소명임을 인식했다.

이후 교회는 폭압으로 일관되던 한국의 정치 사회적 현실 안에서 정치적으로는 민주화, 사회적으로는 인권 수호, 경제적으로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교회의 예언자적 소명을 충실하게 실천한다.

특히 교회가 존립을 위협받을 만큼 도전 앞에서도 참 진리와 생명의 수호를 위한 투쟁에 주저없이 나섬으로써 한국 사회 안에서 양심의 보루로서의 면모를 지켜나간다. 많은 성직자들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들 속에서도 교회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의 실현을 위해 싸움으로써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 12.12 사태, 광주 민주화운동, 고문치사 사건의 폭로를 거쳐 1987년 6.29까지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 전반을 꿰뚫고 나감으로써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획득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내외에 떨친 한국교회의 저력

한국교회의 성장은 이처럼 예언자적 소명의 실천으로써 뿐만 아니라 80년대 초부터 이어진 대규모 종교 집회를 통해서도 큰 탄력을 받았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에 이어,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이뤄진 일련의 사업들은 한국 교회가 급속한 성장을 이루는 분수령이 됐다.

더욱이 그해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하고, 순교자 103위 시성식을 거행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교회내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한국 가톨릭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서울에서 열리고 교황이 재차 방문했다.

이후 한국교회의 교세 신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는 80년대 신자 증가율이 연평균 7.54%를 기록했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1930년 신자수 10만명을 넘어선 이래 1974년말 100만을 돌파했고 11년만인 1985년말 200만명으로 늘었다. 이러한 증가 추세로 7년 뒤인 1992년에는 다시 300만명을 넘어섰다. 이는 휴전 이후 50년대의 폭발적인 교세 증가에 비견될 만한 높은 성장률이었다.

질적 성장의 모색

하지만 90년대 들어서며 한국교회는 양적 성장에 버금가는 질적 성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신자증가율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고, 냉담률이 높아지고 성사 참여율이 고질적인 문제로 고착된다.

이는 60년대와 70년대 누렸던 사회적 호감과 80년대 고조됐던 대규모 종교 집회의 파급 효과가 더 지속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변화된 시대에 걸맞는 질적 성숙, 영성적인 도약을 모색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한국교회는 90년대를 넘어오면서 위기 의식과 문제 인식을 바탕으로 질적 성장을 위한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의 사목적 관심 영역 역시 매우 광범위하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민족화해 문제, 90년대부터 시작된 환경운동에 대한 관심, 낙태 반대운동을 중심으로 한 생명운동, 어느 정도 교회 규모가 성장한 뒤 이어지는 해외원조와 선교의 소명, 한국교회의 고유한 순교신심에 대한 본격화된 관심, 정보사회의 도래와 함께 이어진 정보화 사업 추진 등 각 부문의 활동이 활성화된다.

제삼천년기의 도래, 희망의 문턱을 넘어서

2000년 대희년을 앞둔 세계교회는 지나간 천년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천년기, 새 복음화의 기치를 올리며 쇄신과 변혁의 또 한 번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지금도 계속되는 새 천년기의 시작은 이제 한국교회가 수다한 변화와 쇄신의 계기들을 제대로 정리하고 새롭게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제삼천년기를 새롭게 열어가려는 노력,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여의치 않은 쇄신과 변혁의 계기 마련에 다소간 실망도 하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이제 분명히 또 다른 쇄신의 요청을 강력하게 받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과 함께 새 교황을 맞은 보편교회 안에서 바야흐로 한국교회는 한반도 뿐만 아니라 아시아, 나아가 세계 교회 안에서 제 몫을 다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을 조금씩,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더욱 분명하게 깨달아가고 있다.

 

 

 (1) 가톨릭 언론의 태동, ‘천주교회보’의 창간

 

가톨릭신문 지면 자체가 역사적 사료 조선교구 100주년·한국

“本報는 左의 세 가지 要求에 應하야 出生하였으니 一은 南方敎區내의 消息報道요 二는 敎會發展에 대한 意見交換이요 三은 步調一致 이것이외다.”(天主敎會報 1927년 4월1일 창간호에 실린 창간사 中에서)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 아래 한줌의 숨쉬기도 힘겨웠던 1927년 4월 1일. 아래로부터는 23세, 위로는 41세까지 일단의 청년 평신도들이 뜻을 모아 ‘천주교회보’(天主敎會報)를 펴냈다. 2007년이면 역사적인 80주년을 맞게 되는 한국 ‘가톨릭신문’은 바로 이날 그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한국 ‘가톨릭신문’의 효시

 

한국 가톨릭 언론의 태동이라 할 ‘천주교회보’의 탄생에 즈음해 당시 창간호에는 이렇게 노래했다.

“낫다! 낫다! 적고 적은 이내 몸이 고요한 첫 새벽에 그윽히 울리는 종소리처럼 우렁차게 소리치고 나왔다/너무도 오래 묵묵했다. 눈이 있어도 못 보았다. 귀가 있어도 못들었고 입이 있어도 말 못했고 손이 있어도 못 적었다/알고 싶다. 교회 사정 전하고 싶다. 이러저리 진리로써 인간불순 복멸하여 승전고를 울려보자/우리의 이마에는 십자가를 새겼으며, 발사마 향으로 목욕하고 신덕으로 무기 삼아 예수 말씀 앞세우니 위세 당당 이내로세/눈 있는자 어서 보라. 입 있거던 말할지며 용맹커던 도전하라. 모든 사배 만고의 진리에 항복하리라.”

 

이 창간의 노래는 신앙을 지니고 복음을 선포하려는 열정으로 가득찬 젊은 평신도들이 눈으로도 못보고, 귀로도 듣지 못하며, 입으로는 말못하고 손으로도 쓰지 못했던 무력함을 타파하려는 뜨거운 열정의 표현이었다.

교회의 온갖 사정을 널리 알리고, 이곳 저곳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떨치려는 것이었다. 십자가를 앞세우고 굳건한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려는 젊은이들의 풍모는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사배(輩)’, 곧 온 세상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진리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는 신념이었다.

비록 그 시작에 있어서는 수명의 평신도들의 자그마한 몸짓이었지만 실로 그 열매는 풍성했다. ‘천주교회보’는 한국 근현대 격동기를 거쳐오면서 가톨릭신보, 가톨릭시보, 가톨릭신문으로 개칭돼 오면서, 비록 중간 중간 휴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 속에서도 이를 극복하고 간행을 지속해옴으로써 한국 교회사의 산 증인이 됐다.

 

창간의 역사적 배경

 

1919년 3.1 독립만세 운동은 일제의 강점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일제는 이로부터 식민 정책의 전환을 꾀하지 않을 수 없었고, 9월 들어 이른바 문화정책을 통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외에 민간 신문을 인가하게 됐다.

다음해 3월 5일 조선일보가 창간되고 4월 1일에는 동아일보가 창간됐다. 종교신문의 경우에는 시국과 정치 문제에 대한 언급을 금하는 조건 아래 문화정책 발표 이전에도 발행이 가능해 1911년 감리교 선교사가 발행하는 격주간 신문이 발행됐었고 천주교에서는 월 2회 발행하는 경향잡지가 발행되고 있었다.

20년대를 전후해 당시 교회 안의 지식인들은 일본 가톨릭교회에서 발행하는 정기간행물의 독자들이 있었다.

1923년 창간, 현재 일본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가톨릭 타임즈는 대표적인 것이었다. ‘천주교회보’의 발행은 바로 여기에서 자극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당시 천주교회보의 발행은 참으로 만용이라 할 만큼 놀라운 열정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 국민 전체의 문맹률은 80%에 이르렀고, 천주교 신자수는 전체 인구 1900만명 중에서 약 11만명으로 신자 비율은 불과 0.57% 정도에 불과했다.

 

창간 이념

 

창간사에 나타난 ‘천주교회보’의 창간 이념은 소식보도, 의견교환, 보조일치 등 크게 3가지로서 이는 ‘조국성화’와 함께 가톨릭신문의 사시 안에서 충실하게 지켜져 왔었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소식보도(消息報道) : “경향잡지가 있어 교회 소식을 보도하나 우리는 특별히 남방교구 소식을 더 많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제 집안 일을 똑똑히 모름이 수치일 뿐 아니라 그 집을 더 흥왕케할 방도를 세울 수도 없습니다.”

▲의견교환(意見交換) : “우리는 교회 발전을 위하여 분투 노력하여야 되겠습니다. 사람은 행실에 있고 말에만 있지 않은즉 우리는 모든 지혜와 힘과 용맹을 다하여야 되겠고 많은 사람이 합하여 얻은 지혜는 현철한 사람의 지혜 위에 있을 수 있은 즉 우리는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보조일치(步調一致) : “우리는 교회가 목적하는 그곳까지 걸어가야 하겠고 그 길에는 많은 적의 복병이 있은 즉 일치단결하여 용맹한 군대와 같이 행진곡을 따라 보조를 일치하여 규율 있고 훈련 있는 행군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고로 연락단결하여 일치한 보조를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식 보도와 의견 교환의 역할과 기능은 모든 언론의 공통적인 역할과 기대로서, 가톨릭신문은 교회 안의 소식을 가장 충실히 전한, 한국교회 역사의 산 증인이며, 신자 대중의 신앙과 교회 생활을 전하고 그에 대한 여론을 반영해왔다.

교회 언론의 정체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보조일치의 사시이다. 가톨릭 언론은 일반 언론들과는 달리 교회의 선익, 사람들의 영적 선익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공기이며, 이는 가톨릭교회의 정통한 가르침 및 입장에 그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이는 하느님의 섭리와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에 기여해야 하고, 교회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부응해야 하는 교회 언론으로서의 정체성에 깊이 관련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

 

가톨릭신문 79년의 역사를 통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중요성은 그 역사적 의미와 가치이다. 1927년 창간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간행됨으로써 가톨릭신문은 일제시대로부터 이어지는 교회의 생활, 실상에 대한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즉 가톨릭 액션 활동, 복음 선포의 기록들,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과 한국 최초의 공의회, 일제의 교회 탄압 등에 관한 내용들을 충실하게 담고 있는 가톨릭신문 지면은 그 자체로 역사의 사료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한국전쟁 뒤의 지식인들의 개종에 관한 이야기들, 수도회들의 진출과 창설, 각 교구와 본당들의 설립에 대한 자세한 기록들, 교계 제도의 설정 등에 대해서도 가톨릭신문의 지면은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60년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한국 사회와 교회에 소개한 가톨릭신문의 역할은 이후 한국 교회가 공의회 정신을 바탕으로 쇄신과 변혁의 시대를 맞이하는데 크게 기여를 해왔다.

 

아울러 비록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비판적 성찰을 해야 할 부분도 없지 않지만 60년대 이후 한국의 역사 현실, 정치 및 사회 현실 안에서 소외 받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해온 교회가 그리스도의 정의와 사랑을 바탕으로 사회 불의를 고발하고, 인간 존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도록 해준 것은 민족과 역사 안에서도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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