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와 영성]/한국교회사80장면

(8) 1960년 가톨릭 학생 총연합회 전국 대의원 대회

by 세포네 2006. 7. 16.
728x90

학생운동의 진로 연구
이론보다 ‘실천’강조

“전국학생 대의원대회 盛了
- 진리 정의 立脚하여 自己確立하라.
‘현사회와 대학교육에 따른 가톨릭학생운동의 진로(進路)’를 대회 스로강(슬로건)으로 삼고 무더운 한여름도 쉬지 않고 ‘주의영광’을 현양하는 방도를 묘색하려는 대한 가톨릭의 학생들은 五일간의 대회 동안 분과위(分科委) 등을 통한 진지한 연구 끝에 ‘이론에서 실천으로 매진할 것’을 결의했다.

특히 이번 대회는 고등학생들의 ‘천주를 위한 사업’에 적극 활동할 것을 촉구하기 위해 ‘전국고등학생 가톨릭연합회’를 다음 대회때가지 결성하기로 결의하고 그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가톨릭시보 1960년 8월 14일자 1면 중에서)

1960년 8월 4일부터 8일까지 대구 효성여자대학에서는 대한 가톨릭 학생총연합회 ‘전국대의원대회’가 개최됐다. 닷새 동안 열린 이 대의원대회는 여섯 번째로 열리는 모임이었고 ‘현 한국 사회와 대학교육에 따르는 가톨릭학생운동의 진로’를 주제로 삼아 수개월전 4.19 의거 혁명을 통해 신심운동에서 사회참여의 성격을 강하게 띠기 시작한 가톨릭학생운동의 새로운 면모를 검토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광주, 전주, 춘천, 청주 등 8개 교구의 학생 대표와 옵써버 약 一백명이 회의 기간 동안 침식을 같이 하면서 삼복더위 가운데서도, 젊은 정열을 쏟아 ‘학생 신분으로서의 가톨릭 액숀을 어떻게 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전개하느냐’에 대하여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가톨릭시보 1960년 8월 7일자 1면 중에서)

가톨릭학생운동의 청사진 그려

평신도 사도지의 다양한 분야 중 하나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한국 가톨릭학생운동의 기원은 1920년대 청년 신자들이 야학 등의 교육 사업을 비롯해 강연회와 ‘별’, ‘천주교회보‘(가톨릭신문의 전신) 등을 발간하면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활동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모임이 생기면서 시작됐다.

30년대에 ‘경성제대 가톨릭 연구회’ 조직을 시작으로 몇몇 친목회 성격의 학생 모임이 결성됐고, 1945년 11월 ‘서울 가톨릭학생회’가 조직되면서 가톨릭학생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어 서울시내 여대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서울여자가톨릭학생회’가 조직됐고, 1947년에는 ‘서울대학교 가톨릭 연구회’가 생겼다.

주교단으로부터 전국 기구 설립때까지 한국 가톨릭학생운동의 대표성을 인정받았고, 이듬해에는 노주교의 재가를 얻어 국제 가톨릭 학생운동 기구인 ‘팍스 로마나’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그리고 같은해 10월에는 ‘대한 가톨릭 학생 총연합회’(이하 총연)의 설립 총회 겸 제1차 전국 대회를 거행하고 총재에 노기남 주교, 지도 신부에 조인원(빈첸시오, 1907~1978) 신부가 추대됐다. 이어 1956년까지 전국에 연합회가 설립돼 전국 기구로 확대됐으며 각 대학별 학생회들이 속속 결성됐다.

교회 정체성과 진로 모색

약간의 침체와 성숙기를 되풀이하던 총연은 1958년 나상조(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지도신부로 부임하면서 안정적인 성장을 이룬다. 이에 따라 1960년 열린 제6회 전국 대의원 대회는 격변기의 한국 교회와 사회 안에서 가톨릭 학생운동의 정체성과 진로를 모색하는 중요한 자리가 됐던 것이다.

그러한 중요성에 주목해 가톨릭시보는 8월 7일자와 14일자 2주 연속으로 이 대회를 1면 톱으로 보도하고 있다.

“4개 분과위원회로 나누어 앞으로 가톨릭 학생들의 진로를 타개하려던 이 대회는 분과위원회를 통하여 총 十八개 안건을 제출, 토의하여 그중 十六개 안건을 결의하고 二개 안건을 부결하여 다음 대회까지 실천하기로 했다.”(가톨릭시보 1960년 8월 14일자 1면 중에서)

이 대회에서 결의한 안건들은 자기 성찰과 함께 새로운 소명의 확인들이 포함된다. 즉, 과거 학생운동이 소극적이었으며 교리지식도 빈약했음을 인정하고 자기 충실에 진력하기로 했으며, 이를 위해 ‘학술위원회’를 서리하기로 했다. 선교에 대한 결의에 따라 매스컴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학생운동 신문을 발행키로 하고, 여러 전교 및 연구 기관과의 제휴도 고려하기로 했다.

때마침 이즈음 대학과 중고등학교의 수가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학생운동의 조직 활동도 본당에서 학교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대학생 활동과 중고등학교 활동도 점차 분리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