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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특집120

주요기사로 본 가톨릭신문 85년 (2) 시대적 징표에 적극 응답하며 민족 복음화 위해 투신 교회 쇄신과 사회 정의 실현(1962~1981) 60년대와 70년대는 경제성장과 맞물려 있는 한국의 인권운동,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교회 내적으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최, 한국 천주교 자치 교계제도 설정 등 굵직한 사건들로 특징 지워지는 교회 쇄신의 노력이 시작된 시기이다. 1962년 3월 10일 한국교회는 정식으로 교계제도가 설정됐다. 가톨릭시보는 1962년 4월 1일자 1면에 이를 보도했다. ‘대주교 삼위 임명’이란 제하에 ‘자치교구 및 교권상의 완전한 체제’ ‘3대주교구로 확립’이란 제목을 달았다. 가톨릭시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준비 상황을 적극적으로 보도했고, 1964년 6월 가톨릭신문사 사장으로 부임한 김수환 추기경은 직접 외신.. 2012. 4. 1.
주요기사로 본 가톨릭신문 85년 (1) 민족과 교회 고난·영광의 역사 함께해온 85년 지난 20세기, 근·현대 1백년은 유례없는 격동기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기 전에 만난 고난과 박해의 터널을 지나 1886년 한불수호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교회는 가까스로 얻은 선교의 자유를 바탕으로 19세기말과 20세기 초를 거치며 꾸준한 발전을 거듭하다가 다시금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땅, 그 혹독한 탄압 속에서 민족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마침내 광복, 하지만 우리 민족은 수십 년의 억압을 헤치고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또 다른 비극의 운명에 처하고 만다. 열강의 침략적 속성을 여실히 드러냈던 전후 민족 분단의 과정은 기어이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2012. 4. 1.
[교회건축을 말한다] 제2화 ⑴ 한국 성당건축 Ⅰ: 1960년대 이전 [교회건축을 말한다] 제2화 ⑴ 한국 성당건축 Ⅰ: 1960년대 이전 공사 시작은 명동성당, 준공은 약현성당 먼저 ▲ 전형적 고딕교회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서울 명동성당 전경.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옥 교회건축물인 화산(현 나바위)성당 내부. 1784년 겨울,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최초 영세자 이승훈이 도성 안 수표교 근처에 있던 이벽 집에서 세례를 행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 천주교회가 세워졌다. 이후 신자들이 명례방 김범우 집에서 집회를 가졌다고 하니 처음에는 신앙공동체로서 교회만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1899년 교민조약에 의해 신앙의 자유를 확보했지만 성당을 짓기 위한 움직임은 그 이전에 시작됐다. 1883년 도성 내 서양인 거주가 허락되면서 외국인의 토지 구입이 가능해지자, 천주교 측에.. 2012. 3. 25.
사순 기획/ 그리스도 수난의 증거 (하) - 성 십자가 성 십자가 '복된 수난' 증표이자 구원의 표징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십자가'는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이들의 표지가 됐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네 복음서(마르 14-15장;마태 26-27장;루카 22-23장;요한 18-19장)뿐 아니라 로마 역사가 타치투스 「연대기」, 루치아노스의 「나그네 죽음.. 2012. 3. 25.
사순기획 '그리스도 수난의 증거'<상> - 베로니카 수건 하느님께서 직접 그리신 그림 - 진품 여부 떠나 믿음 굳건히 회복시켜주는 성화 사순절 한 가운데 서 있다. 예수께서 걸으셨던 수난의 길을 묵상할수록 참생명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예수의 수난을 상상하는 것만으론 그 고통을 실감할 수 없다. 예수의 수난은 실재했던 사건이다.. 2012. 3. 25.
[위령성월 기획 Ⅰ]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 위령성월 어떤 의미인가 산 이와 죽은 이들 모두 동일한 구성원 모든 성인의 통공 교리, 위령성월 이해하는 바탕 세상 떠난 이들 위해 기도하고 자신의 죽음 묵상 ▲ 2009년 11월 7일 오후. 경기도 의왕 라자로마을을 찾은 백발의 할머니가 한센병 환우들의 벗으로 헌신한 스위니 신부와 황영희 교수의 묘 앞에서 연도를 바치고 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다 (히브 9,27).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특별히 기억하며 기도하는 위령성월을 맞았다. 누구나 한 번은 맞게 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 의미를 되짚어 보는 달이다. 또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한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지 이웃들을 떠올리고 기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같은 위령성월의 역사적 근거와 진정한 의미는 어떤 것일까. 위령성월을 기해 그 유래와 의의 등을 .. 2011. 11. 6.
조선대목구 설정 180주년 특집 <하> 찬란한 복음의 빛이 조선으로 향하다 ▲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저희는 내일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제 앞에는 온갖 어려움과 장애와 위험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는 머리를 숙이고 이 미로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2년 11월에 쓴 첫 번째 사목서한. 1832년 12월 조선의 양떼 돌보려 마카오서 떠나 푸젠·난징·베이징·시완쯔 거쳐 마치아쯔 도착 조선 입국 눈앞에 두고 1835년 11월 19일 선종 "조선인 새 신자들을 보살펴라" #1. "제가 가겠습니다." 청원은 계속됐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이어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으로도 편지를 보내 조선 선교사로 가겠다는 의지를 거듭 표명했다. 시암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도 이에 동의하는 서한을 포교성성에 보냈다. 1829년 한 .. 2011. 9. 11.
조선대목구 설정 180주년 특집 <상> "조선 선교사로 제가 가겠습니다." 오는 9일로 조선대목구 설정 180주년을 맞는다. 한국천주교회의 '뿌리'가 된 조선대목구는 이제 19개 교구(침묵의 교회인 덕원자치수도원구, 함흥ㆍ평양교구 포함)에 이르는 '가지'로 자라나 뻗어간다. 더불어 조선대목구가 서울ㆍ대구대목구로 분리된 지도 꼭 100년으로, 그 시점은 1911년 4월 8일이었다. 침묵의 교회를 제외한 한국교회 16개 교구 신자 수는 2010년 말 현재 520만 5589명이며 복음화율은 10.1%다. 성장엔 명암이 있다. 주일미사 참례자 수는 141만여 명으로 27.2%에 그치고 있고, 신자증가율도 전년도에 비해 1.7%(14만 644명)대로 떨어졌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첫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초심은 조선대목구 설정 당시 오간 서한과 교황 소칙서 등에 그대로 담겨 있다. 이에.. 2011. 9. 11.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Ⅳ - 선교·수도회 좌담 선교사, 목숨걸고 박해 속 한국교회 초석 다져 “각 수도회 고유 카리스마로 복음화 기여할 것” 외적 성장보다 영적 성숙 위해 투신해야 젊은이들 위한 사목·성소개발 노력 필요 이제는 해외선교에 관심갖고 지원할 때 복음화율 10%를 넘긴 상황이지만 내적 질적 복음화를 향한 ‘새시대 새복음화’에 대한 논의가 한국교회 곳곳에서 분출되고 있는 가운데 본지는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를 주제로 특별 좌담회를 마련했다. 창간 84주년 특별기획 일환으로 시도된 좌담은 한말 일제시대, 피바람 몰아치는 박해와 여러 고난 속에서 한국교회 설립의 뼈대를 놓고 기틀을 이뤘던 선교회 수도회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교회 초창기의 근원을 살펴보고자 시도됐다. 한국교회가 비록 자생적으로 생겨났지만 선교사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초창.. 2011. 4. 3.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Ⅲ - 평신도 활동을 통해 본 선교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의 한국교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역사는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평신도’와 ‘선교사’의 접점에 가장 먼저 정하상 바오로와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나게 하고 있다.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평신도들의 노력을 통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이자 조선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파견됐으니 말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안타까운 선종으로 그들의 만남은 직접 이뤄질 수는 없었으나, 평신도들의 눈물겨운 바람은 선교의 씨앗을 마침내 조선 땅에 떨어뜨리게 했다.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편은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각 수도회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도록 도움을 준 평신도들을 발굴하고, 행적의 의미와 그들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살펴본다. 평신도의 .. 2011. 4. 3.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Ⅱ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교우촌의 역사 함께 살고 함께 성화되는 ‘소공동체 전형’ 박해 계기로 전국에 교우촌 형성·신앙 전파 모범적 신자 활동 돋보이는 ‘본당 설립 원형’ 당시 신앙 연구로 현대 영성 체계 마련 시급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것을 모두 다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시오”(마태 28,19-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남기신, 신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소명이다. 우리나라의 복음화율은 지속적인 성장세를 이뤄, 2009년 말 현재 총인구 대비 총신자 비율 10%를 넘어섰다. 이러한 복음화의 구심점으로 바로 본당을 꼽을 수 있다. 본당은 각 지역사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현하는 구심점이 되어 왔다. 본당 수도 전국적으로 꾸준.. 2011. 4. 3.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Ⅰ - 총론 외화내빈 한국교회 ‘초심’으로 돌아갈 때 신자수 10% 넘었지만 영적·질적 성숙은 미흡 죽음으로 신앙 증거한 선조들 노력 돌아보고 외적 성장에 걸맞는 내적 성장 계기 만들어야 1831년 조선대목구 설립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교회를 북경교구로부터 분리하여 독립된 대목구로 설립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교회 창설과 더불어 끊임없는 박해속에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주문모 신부를 비롯, 수많은 순교자를 낳고 목자없는 교회가 됐던 조선의 교우들이 지하에서나마 자생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북경 주교와 교황청에까지 성직자 영입 운동을 끊임없이 호소한 결과였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마침내 이날 파리외방전교회로 하여금 전교 사업을 담당하게 함과 동시에 자원해서 조선에 가기를 간청한 브뤼기.. 2011.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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