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영성]/특집124 [우리 곁에 남은 세계적 문화유산 - 한옥교회] 한옥교회 건축의 가치 높은 수준의 토착화 보여주는 동서양 건축문화 융합 한옥교회는 조선시대 선교 초기부터 일제강점기 말까지 상당 기간 국내 그리스도교 건축의 주류 형식으로 존재해왔다. 전문가들은 그중 원형이 잘 보존된 천주교 5개소, 성공회 3개소, 개신교 2개소의 건물을 세계유산 잠정 후보로 제안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준에 적용해볼 때, 한옥교회가 지닌 대표적인 가치로는 ‘인간적 가치의 중요한 교류’, ‘문화적 전통을 전승하는 증거’,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살아있는 전통과의 연계’ 등을 꼽을 수 있다. 우선 한옥교회는 “일정한 시대와 문화지역 안에서 일어난 건축, 기술, 기념비적 예술, 도시계획 또는 조경설계의 발전에 관한 인간적 가치의 중요한 교류”를 보여준다. 한옥교회는 서양 선교사의 지도로 한.. 2012. 8. 12. 여름기획 - 공소의 재발견 제주교구 추자공소 천혜의 절경·순교자 후손 역사 하나로 어울린 땅 주일미사 참례자 30여 명인 공소 전신자 노력으로 새 건물도 봉헌 제주 절경 보며 황경한 묘 참배 가능 ‘산 좋아하는 사람은 죽기 전에 다녀가야 할 곳’, 전국의 관광 명소를 두루 다녀본 사람들이 추자도를 이르는 말이다. 추자도는 그만큼 천혜의 자연경관을 청정하게 보존하고 있는 섬이다. 제주항에서 북쪽으로 약 45km 떨어져 있다. 상·하추자도 두 개의 섬과 부속도서로 구성된 추자도의 넓이는 약 7k㎡로 잠실야구장의 670배 크기다. 행정구역상 제주시에 속해 있지만 제주도와 전라남도 중간에 위치한 고도(孤島)다. 생활권은 제주도보다 전남과 가까워 추자도 주민들은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 추자도는 본래 전남에 속해 있다가 1946년 8월 제주.. 2012. 7. 22. 걷기의 영성 걷기, 두 발로 봉헌하는 기도이자 비움의 영적 여정 저마다 길에 오른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위해, 또 어떤 사람은 걷는 동안만큼은 자유롭고 행복하다며 둘레길, 올레길을 뚜벅뚜벅 걷는다. 걷기만큼 좋은 운동도 없다. 의사들이 고혈압ㆍ당뇨병ㆍ고지혈증ㆍ우울증 환자에게 빼놓지 않고 권하는 게 걷기다. 동의보감에서도 "약보(藥補) 보다는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 보다는 행보(行補)가 낫다"(좋은 약을 먹는 것보다 좋은 음식이 낫고, 음식을 먹는 것보다 걷기가 낫다)며 걷기를 최고의 건강법으로 친다. ▲ 그리스도인에게 걷기는 두 발로 봉헌하는 순례의 기도이자 비움의 영적 여정이다. 사진은 강원도 강릉 바우길 제10구간 심스테파노 길을 걷고 있는 강릉 임당동본당 신자들. 평화신문 자료사진 #걷기본능을 잃어가는 현.. 2012. 6. 17. 박해시대 신앙선조들, 부활시기 어떻게 보냈을까 부활시기에 포졸 습격, 체포 집중... 개 잡고 술 빚어 '잔치' 벌이기도... 드러내놓고 부활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는 어려웠지만 부활기쁨 살았기에 순교 박해시대 신앙선조들은 '회개와 기도의 때' 사순시기 40일을 보내고 어떻게 부활시기 50일을 보냈을까. 그 풍경을 보려면, 「황사영 백서」나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등 각종 사료를 살펴볼 수밖에 없다. 이들 사료를 통해 50일간을 단 하루 축일처럼 기뻐 용약하며 지낸 박해시대 신자들의 '부활살이'를 들여다본다. ▲ 이중배 순교자가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아 원경도 요한 등과 함께 교우 정종호의 집에 모여 음식을 나누며 부활삼종기도를 바치고 예수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알렐루야를 부르며 전례적으로 기쁨을 드러내는' 50일 축제이.. 2012. 4. 8. 주요기사로 본 가톨릭신문 85년 (2) 시대적 징표에 적극 응답하며 민족 복음화 위해 투신 교회 쇄신과 사회 정의 실현(1962~1981) 60년대와 70년대는 경제성장과 맞물려 있는 한국의 인권운동,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교회 내적으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최, 한국 천주교 자치 교계제도 설정 등 굵직한 사건들로 특징 지워지는 교회 쇄신의 노력이 시작된 시기이다. 1962년 3월 10일 한국교회는 정식으로 교계제도가 설정됐다. 가톨릭시보는 1962년 4월 1일자 1면에 이를 보도했다. ‘대주교 삼위 임명’이란 제하에 ‘자치교구 및 교권상의 완전한 체제’ ‘3대주교구로 확립’이란 제목을 달았다. 가톨릭시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준비 상황을 적극적으로 보도했고, 1964년 6월 가톨릭신문사 사장으로 부임한 김수환 추기경은 직접 외신.. 2012. 4. 1. 주요기사로 본 가톨릭신문 85년 (1) 민족과 교회 고난·영광의 역사 함께해온 85년 지난 20세기, 근·현대 1백년은 유례없는 격동기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기 전에 만난 고난과 박해의 터널을 지나 1886년 한불수호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교회는 가까스로 얻은 선교의 자유를 바탕으로 19세기말과 20세기 초를 거치며 꾸준한 발전을 거듭하다가 다시금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땅, 그 혹독한 탄압 속에서 민족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마침내 광복, 하지만 우리 민족은 수십 년의 억압을 헤치고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또 다른 비극의 운명에 처하고 만다. 열강의 침략적 속성을 여실히 드러냈던 전후 민족 분단의 과정은 기어이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2012. 4. 1. [교회건축을 말한다] 제2화 ⑴ 한국 성당건축 Ⅰ: 1960년대 이전 [교회건축을 말한다] 제2화 ⑴ 한국 성당건축 Ⅰ: 1960년대 이전 공사 시작은 명동성당, 준공은 약현성당 먼저 ▲ 전형적 고딕교회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서울 명동성당 전경.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옥 교회건축물인 화산(현 나바위)성당 내부. 1784년 겨울,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최초 영세자 이승훈이 도성 안 수표교 근처에 있던 이벽 집에서 세례를 행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 천주교회가 세워졌다. 이후 신자들이 명례방 김범우 집에서 집회를 가졌다고 하니 처음에는 신앙공동체로서 교회만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1899년 교민조약에 의해 신앙의 자유를 확보했지만 성당을 짓기 위한 움직임은 그 이전에 시작됐다. 1883년 도성 내 서양인 거주가 허락되면서 외국인의 토지 구입이 가능해지자, 천주교 측에.. 2012. 3. 25. 사순 기획/ 그리스도 수난의 증거 (하) - 성 십자가 성 십자가 '복된 수난' 증표이자 구원의 표징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십자가'는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이들의 표지가 됐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네 복음서(마르 14-15장;마태 26-27장;루카 22-23장;요한 18-19장)뿐 아니라 로마 역사가 타치투스 「연대기」, 루치아노스의 「나그네 죽음.. 2012. 3. 25. 사순기획 '그리스도 수난의 증거'<상> - 베로니카 수건 하느님께서 직접 그리신 그림 - 진품 여부 떠나 믿음 굳건히 회복시켜주는 성화 사순절 한 가운데 서 있다. 예수께서 걸으셨던 수난의 길을 묵상할수록 참생명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예수의 수난을 상상하는 것만으론 그 고통을 실감할 수 없다. 예수의 수난은 실재했던 사건이다.. 2012. 3. 25. [위령성월 기획 Ⅰ]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 위령성월 어떤 의미인가 산 이와 죽은 이들 모두 동일한 구성원 모든 성인의 통공 교리, 위령성월 이해하는 바탕 세상 떠난 이들 위해 기도하고 자신의 죽음 묵상 ▲ 2009년 11월 7일 오후. 경기도 의왕 라자로마을을 찾은 백발의 할머니가 한센병 환우들의 벗으로 헌신한 스위니 신부와 황영희 교수의 묘 앞에서 연도를 바치고 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다 (히브 9,27).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특별히 기억하며 기도하는 위령성월을 맞았다. 누구나 한 번은 맞게 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 의미를 되짚어 보는 달이다. 또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한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지 이웃들을 떠올리고 기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같은 위령성월의 역사적 근거와 진정한 의미는 어떤 것일까. 위령성월을 기해 그 유래와 의의 등을 .. 2011. 11. 6. 조선대목구 설정 180주년 특집 <하> 찬란한 복음의 빛이 조선으로 향하다 ▲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저희는 내일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제 앞에는 온갖 어려움과 장애와 위험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는 머리를 숙이고 이 미로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2년 11월에 쓴 첫 번째 사목서한. 1832년 12월 조선의 양떼 돌보려 마카오서 떠나 푸젠·난징·베이징·시완쯔 거쳐 마치아쯔 도착 조선 입국 눈앞에 두고 1835년 11월 19일 선종 "조선인 새 신자들을 보살펴라" #1. "제가 가겠습니다." 청원은 계속됐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이어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으로도 편지를 보내 조선 선교사로 가겠다는 의지를 거듭 표명했다. 시암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도 이에 동의하는 서한을 포교성성에 보냈다. 1829년 한 .. 2011. 9. 11. 조선대목구 설정 180주년 특집 <상> "조선 선교사로 제가 가겠습니다." 오는 9일로 조선대목구 설정 180주년을 맞는다. 한국천주교회의 '뿌리'가 된 조선대목구는 이제 19개 교구(침묵의 교회인 덕원자치수도원구, 함흥ㆍ평양교구 포함)에 이르는 '가지'로 자라나 뻗어간다. 더불어 조선대목구가 서울ㆍ대구대목구로 분리된 지도 꼭 100년으로, 그 시점은 1911년 4월 8일이었다. 침묵의 교회를 제외한 한국교회 16개 교구 신자 수는 2010년 말 현재 520만 5589명이며 복음화율은 10.1%다. 성장엔 명암이 있다. 주일미사 참례자 수는 141만여 명으로 27.2%에 그치고 있고, 신자증가율도 전년도에 비해 1.7%(14만 644명)대로 떨어졌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첫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초심은 조선대목구 설정 당시 오간 서한과 교황 소칙서 등에 그대로 담겨 있다. 이에.. 2011. 9. 11. 이전 1 ··· 5 6 7 8 9 10 1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