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십자가 '복된 수난' 증표이자 구원의 표징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십자가'는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이들의 표지가 됐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네 복음서(마르 14-15장;마태 26-27장;루카 22-23장;요한 18-19장)뿐 아니라 로마 역사가 타치투스 「연대기」, 루치아노스의 「나그네 죽음」 등에 기록돼 있다.
'복된 수난'의 증표인 예수님의 성 십자가는 오늘날까지 교회의 가장 귀중한 성물로 보존되고 있다.
▨ 성녀 헬레나가 발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셨던 곳인 골고타는 제2차 유다항쟁(132~135)이 끝나던 해에 로마 최고 신인 제우스를 비롯해 헤라와 아프로디테의 신전터가 됐다.
당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가 유다인들의 독립 항쟁 의지를 꺾고, 예수님 무덤을 자주 찾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흩어지게 하려고 유다 총독 안니우스 루푸스를 시켜 골고타 흔적을 없애버린 것이다.
하느님의 섭리인지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신전 때문에 325년 콘스탄티누스 대제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가 이곳을 순례 와서 골코타 언덕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헬레나 성녀는 326년 신전을 허물고 골고타를 발굴, 성 십자가와 예수님 빈 무덤을 찾아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 거룩한 무덤 대성당'(예수님 부활 대성당)을 세웠다.
전승에 의하면, 헬레나 성녀는 예루살렘 주교 마카리오스와 함께 골고타에서 십자가 3개를 찾아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매달렸던 십자가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어 걱정하다가 막 매장하려던 시신(또 다른 전승은 고질병 환자라 함)을 가져와 3개의 십자가에 차례로 올려 놓았더니 그 중 한 십자가에서 시신이 기적같이 살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이 예수님의 성 십자가인 줄 알게 됐다고 전한다. 또 성 십자가와 함께 쇠못 3개와 예수님의 죄명패를 발굴했다고 한다.
▨ 삼등분된 성 십자가
헬레나 성녀는 성 십자가를 삼등분해 하나는 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아들에게 보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주교 마카리오에게 주고, 남은 부분을 로마로 가져왔다.
헬레나 성녀는 자신의 세소리아누스궁을 성당으로 개조해 로마로 가져온 성 십자가를 안치했다. 그는 궁전 바닥을 모두 뜯어내 골고타에서 가져온 흙으로 덮고 "이곳은 로마가 아니라 예루살렘 땅"이라고 했다. 그리고 궁을'예루살렘 성 십자가 성당'이라 명명했다.
헬레나 성녀는 성 십자가와 함께 골고타에서 가져온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 일부와 못,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새겨진 죄명패, 예수님께서 묶여 채찍질을 당했던 돌기둥 파편과 무덤의 돌조각, 베들레헴 마구간 구유 조각, 토마스 사도의 손가락 뼈(요한 20,24-29)도 이 성당에 모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임종하시기 전에 "목마르다"고 하셨을 때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는데 바로 그 해면도 이 성당에 안치했다. 로마 '예루살렘 성 십자가 성당'은 오늘날도 끊임없이 순례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한편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새 로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완공식을 330년 거행하고 이 신도시의 핵심인 '밀리온'에 성 십자가를 안치했다. 네 개의 아치형 개선문이 정사각형을 이뤄 둥근 돔형 천장을 떠받치는 형태로 만들어진 밀리온은 로마 제국 각 지역까지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이었다. 즉 '세계의 중심'인 그 자리에 콘스탄티노플 대제는 성 십자가를 안치해 이제 세계가 그리스도 십자가 아래에 있음을 증거했다. 이후 성 십자가는 새로 건립된 성 소피아 성당으로 옮겨졌다.
예루살렘 주교에게 맡겨진 나머지 성 십자가 조각은 예수님 부활 대성전에 모셔졌다. 은장 성물함에 모셔진 성 십자가 조각은 순례자들에게 정기적으로 현시됐다. 하지만 614년 페르시아 샤흐르바라즈(멧돼지 왕)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또 한 번의 수난을 겪는다. 당시 예루살렘에선 사흘간 학살극이 벌어져 살아남은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었다. 예수님 부활 대성당을 비롯해 주요 성당들은 모두 불타 잿더미로 변했고 즈카르야 총대주교는 포로로 잡혔다. 성 십자가와 성창 등 예수님 수난과 관련된 성물들은 강탈돼 크테시폰으로 옮겨졌다.
628년 동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페르시아와의 15년간 전쟁을 끝내는 강화 조약을 맺고 성 십자가를 비롯한 예수님 수난 성물들을 반환받아 성 십자가가 안채돼 있던 성 소피아 성당에 임시로 모셨다. 성 소피아 성당은 잠시나마 두개의 성 십자가를 모시게 됐다.
이듬해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예루살렘에 재건된 예수님 부활 대성당에 직접 성 십자가를 안치했다. 이 때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화려한 의관을 갖추고 직접 성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올라가려 했으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힘을 써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뜻하지 않은 광경에 주위 사람들은 당황해 웅성거렸다. 그때 즈카르야 총주교가 황제에게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관을 머리에 쓰고 군인이 입던 헌옷을 두르고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폐하는 금관과 화려한 차림을 하고 계십니다. 아마 이것이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 신앙이 두터운 황제는 이 말을 듣고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다시 십자가를 지니 아무 일이 없는 듯 순순히 발걸음이 떨어졌다고 한다.
동ㆍ서방 가톨릭교회는 이를 기념해 오늘날까지 매해 9월 14일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고 있다.
성 십자가는 십자군 운동이 일어나면서 유럽 곳곳에 분산됐다. 특히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콘스탄티노플 약탈은 더욱 심했다. 오늘날 유럽 각 성당에 안치돼 있는 성 십자가 조각 대부분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왔다.
▨ 성 십자가 공경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현양이다. 성 십자가 공경은 초대교회 때부터 이어온 교회 전통 신심이다.
성녀 헬레나가 성 십자가를 발굴한 후부터 예루살렘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성 십자가를 경배하러 이른 아침부터 골고타에 몰려들었고 오후에는 수난에 관한 시편과 사도행전ㆍ서간복음서를 봉독하는 말씀 전례가 거행됐다.
7세기부터는 성 금요일에 교황이 성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맨발로 라테란 대성전에서 로마의 '예루살렘 성 십자가 성당'까지 행렬했다. 옛 전례력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예수 부활과 주님 승천 대축일과 같이 대축일로 지냈다.
동방교회에서는 '성 십자가 경배(사순 제3주일)ㆍ변모(8월1일)ㆍ 현양' 세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크레타의 성 안드레아 주교는 '성 십자가 공경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강론했다.
"우리는 오늘 암흑이 쫓겨나고 빛이 다시 오게 한 성 십자가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 십자가 축일을 지내면서, 땅과 죄를 밑에다 남겨 버리고 위에 있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함께 들려 올라갑니다. 십자가는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것을 소유하는 이는 귀중한 보화를 소유합니다. 십자가는 그 이름으로 또 실제로도 지상 어떤 것보다도 더 고귀하고 보배로운 것이기 때문에 저는 '참 보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안에, 그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이 되돌아옵니다.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더라면 그분의 늑방이라는 불사불멸의 샘물에서 세상의 죄를 씻어 주는 피와 물이 흘러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우리 죄 문서가 무효화되지 않았을 것이며 우리는 자유를 얻지 못하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맛보지도 못했을 것이며 낙원의 문이 열려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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