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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
"저희는 내일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제 앞에는 온갖 어려움과 장애와 위험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는 머리를 숙이고 이 미로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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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2년 11월에 쓴 첫 번째 사목서한. |
1832년 12월 조선의 양떼 돌보려 마카오서 떠나
푸젠·난징·베이징·시완쯔 거쳐 마치아쯔 도착
조선 입국 눈앞에 두고 1835년 11월 19일 선종
"조선인 새 신자들을 보살펴라"
#1. "제가 가겠습니다." 청원은 계속됐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이어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으로도 편지를 보내 조선 선교사로 가겠다는 의지를 거듭 표명했다. 시암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도 이에 동의하는 서한을 포교성성에 보냈다. 1829년 한 해 동안 여러 통의 서한이 파리에, 바티칸에 도착했다.
청원이 받아들여진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831년 7월이었다. 이에 앞서 포교성성 장관이던 바르톨로메오 카펠라리 추기경이 그해 2월 교황에 선출됐다. 그레고리오 16세다. 교황은 자신이 장관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관여한 조선교회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고자 했다. 포교성성은 그해 7월 브뤼기에르 주교 청원을 허락하며 조선대목구 설정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들어갈 수 있을 때 허락한다고 밝힌다. 두 달 뒤인 9월 9일에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한다는 소칙서를 반포한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임명 소칙서에는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성좌의 지극한 관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존경하는 형제여! 소조폴리스의 주교인 시암대목구장 부주교인 귀하께서 조선인의 나라로 들어가 조선인 새 신자들을 보살필 책임을 맡도록 허락해 달라고 겸손하게 청원했을 때, 본인은 조선 그리스도인들의 절박한 사정을 심사숙고하고, 덧붙여 시암대목구장이 자신의 부대목으로 선출할 다른 알맞은 신부를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는 이유를 참작하고, 로마교회 추기경들과 의논하여 귀하의 간청을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아무런 장애가 없다면 귀하가 새로운 선교지로 떠나 그 선교지에서 참으로 순조롭고 성공적인 출발을 이끌어 나가도록 허락합니다."
#2.조선교회가 보편교회의 새 일원이 된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시작이었다.
특히 포르투갈의 보호권(padroado) 문제가 불거졌다. 교황청과 조약을 맺고 중국을 포함해 동아시아 선교 보호권을 행사하던 포르투갈 주교나 신부들은 교황청 직속 대목구를 증설하려는 선교지역 재편에 반대했다. 포르투갈은 선교지 보호 의무는 이행치 않으면서 주교 임명권이나 십일조 수취권만을 주장한 것이다. 조선대목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 또한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무관심으로 어려움에 처한다. 대표적 경우가 난징교구장 겸 베이징교구장 서리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와의 갈등이었다. 페레이라 주교는 조선대목구 설정을 반기고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대목구장 취임을 인정하면서도 조선 입국을 돕기보다는 그저 방관하는 자세를 보였다. 1834년 초 조선에 입국한 두 번째 중국인 사제인 여항덕(파치피코) 신부도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과 갈등을 빚어 모방 신부는 1836년 조선대목구장 직무대행자의 권한으로 여 신부에게 성무집행 정지를 내릴 정도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8월 마카오로 가 조선 입국을 준비한다. 페낭신학교 재학 중 병으로 학교를 그만둔 왕요셉이라는 중국인 청년과 함께였다. 마카오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오해를 푼 브뤼기에르 주교는 다시 포교성성에도 서한을 보내 조선 선교지를 다시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토록 청원함으로써 1833년 9월엔 드디어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지를 자신들의 관할지역으로 받아들인다.
조선 교우들에게 사목서한 보내
#3."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여러분의 소원이 이뤄졌습니다. 왜냐하면 교황님께서 여러분이 서한을 통해 청한 유럽인 주교를 어떤 중국인과 함께 파견하셨기 때문입니다. 조선에 있는 양들에게 목자가 없다는 소식이 여러분들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우리는 조국을 떠나 다른 대목구를 맡고 있었으나, 교황님께 서한을 올려 빵을 청하는 이들에게 그것을 쪼개어 나누어줄 사명을 지닌 주교들과 사제들을 파견해 줄 것을 줄곧 청해왔습니다.… 조선 왕국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 삶을 바칠 것입니다."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 소장 한국관계 문서철 제578권에 전해지는 사목서한은 오늘날에 읽어도 가슴을 뜨겁게 한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11월 마카오에서 조선 교우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날마다 기도 중에 조선 교우들을 복되신 동정녀와 모든 천사들의 보호에 맡긴다.
그리고서 1832년 12월 마카오를 떠난 브뤼기에르 주교는 푸젠(福建)대목구를 거쳐 난징(南京)교구에 다다른다. 여기에서 미리 베이징에 보낸 왕요셉을 통해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레이라 주교 혹은 그 대리인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를 받는다. 이 편지에서 자신의 임명 소식에 대해 조선 신자들이 보인 환희에 찬 반응을 본 브뤼기에르 주교는 다시 난징을 출발, 한 달간의 긴 여행 끝에 대륙을 종단해 베이징 인근 교우촌에 도착했다. 그 사이 피로와 더위, 부족한 음식, 질병, 박해 위협 등으로 갖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어 3주 가량 휴식을 취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레이라 주교의 권유에 따라 산시(山西)대목구 타이위안으로 가서 1년간 머무르다가 1834년 10월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들의 활동근거지였던 허베이성 시완쯔(西灣子)로 거처를 옮긴다.
1931년 한국으로 유해 모셔와
#4. 조선 입국은 갈수록 늦춰졌다. 남이관(세바스티아노) 등은 1834년 가을에 작성한 서한을 통해 조선 사정이 좋지 않아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서양인들은 겉모습이나 말이 판이하게 달라 당국에 발각되기 쉽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월 왕요셉을 베이징으로 보내 동지사 일행에 끼어 청나라에 들어온 조선교회 밀사들을 설득한다. 그 친서는 오늘날에도 전해진다. "여러분의 결정이 어떠하든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서 위임받은 선교 임무를 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1835년 음력 11월 중에 조선 국경으로 가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문을 두드릴 것이고, 교우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보내주신 주교를 받아들일 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수천 명 교우 중에 한 명쯤은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이에 조선 교우들은 그해 1월 20일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연말에는 반드시 조선으로 맞아들이겠다고 약속한다.
실로 오랜 만에 조선으로 밀입국할 가능성이 보였다. 게다가 브뤼기에르 주교가 그해 5월 랴오뚱에 파견했던 중국인 전교회장이 비엔먼 근처 민가를 빌려놓고 10월에 시완쯔로 돌아와 조선 입국에 빛이 비쳤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47㎞(120리) 정도 떨어진 비엔먼 근처 민가에서 숨어지내다가 조선 교우들을 만나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널 작정이었다.
그해 10월 안내인들과 함께 시완쯔를 떠나 비엔먼으로 향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네이멍구 마치아쯔(馬架子)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랴오뚱으로 떠날 준비를 하며 보름 가량 머무르려 했다.
하지만 그곳까지였다. 1835년 10월 19일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진 브뤼기에르 주교는 회복하지 못한 채 이튿날 불과 43살 나이로 하느님 품에 안긴다. 그 심경은 마카오에 있는 동료 선교사에게 보낸 브뤼기에르 주교의 마지막 편지(1835년 10월 6일자)에 담겨 있다. "저희는 내일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앞으로가 제 여행 중 가장 험난한 여정입니다. 제 앞에는 온갖 어려움과 장애와 위험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는 머리를 숙이고 이 미로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해 11월 21일 마치아쯔에 묻혔고,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한국으로 유해가 모셔져 서울 용산 성직자묘역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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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4월 브뤼기에르 선종지 마치아쯔에 들러 브뤼기에르 주교 묘비 앞에서 기도를 바치는 서울 개포동본당 순례단. 평화신문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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