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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특집124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Ⅳ - 선교·수도회 좌담 선교사, 목숨걸고 박해 속 한국교회 초석 다져 “각 수도회 고유 카리스마로 복음화 기여할 것” 외적 성장보다 영적 성숙 위해 투신해야 젊은이들 위한 사목·성소개발 노력 필요 이제는 해외선교에 관심갖고 지원할 때 복음화율 10%를 넘긴 상황이지만 내적 질적 복음화를 향한 ‘새시대 새복음화’에 대한 논의가 한국교회 곳곳에서 분출되고 있는 가운데 본지는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를 주제로 특별 좌담회를 마련했다. 창간 84주년 특별기획 일환으로 시도된 좌담은 한말 일제시대, 피바람 몰아치는 박해와 여러 고난 속에서 한국교회 설립의 뼈대를 놓고 기틀을 이뤘던 선교회 수도회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교회 초창기의 근원을 살펴보고자 시도됐다. 한국교회가 비록 자생적으로 생겨났지만 선교사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초창.. 2011. 4. 3.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Ⅲ - 평신도 활동을 통해 본 선교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의 한국교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역사는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평신도’와 ‘선교사’의 접점에 가장 먼저 정하상 바오로와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나게 하고 있다.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평신도들의 노력을 통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이자 조선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파견됐으니 말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안타까운 선종으로 그들의 만남은 직접 이뤄질 수는 없었으나, 평신도들의 눈물겨운 바람은 선교의 씨앗을 마침내 조선 땅에 떨어뜨리게 했다.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편은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각 수도회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도록 도움을 준 평신도들을 발굴하고, 행적의 의미와 그들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살펴본다. 평신도의 .. 2011. 4. 3.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Ⅱ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교우촌의 역사 함께 살고 함께 성화되는 ‘소공동체 전형’ 박해 계기로 전국에 교우촌 형성·신앙 전파 모범적 신자 활동 돋보이는 ‘본당 설립 원형’ 당시 신앙 연구로 현대 영성 체계 마련 시급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것을 모두 다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시오”(마태 28,19-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남기신, 신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소명이다. 우리나라의 복음화율은 지속적인 성장세를 이뤄, 2009년 말 현재 총인구 대비 총신자 비율 10%를 넘어섰다. 이러한 복음화의 구심점으로 바로 본당을 꼽을 수 있다. 본당은 각 지역사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현하는 구심점이 되어 왔다. 본당 수도 전국적으로 꾸준.. 2011. 4. 3.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Ⅰ - 총론 외화내빈 한국교회 ‘초심’으로 돌아갈 때 신자수 10% 넘었지만 영적·질적 성숙은 미흡 죽음으로 신앙 증거한 선조들 노력 돌아보고 외적 성장에 걸맞는 내적 성장 계기 만들어야 1831년 조선대목구 설립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교회를 북경교구로부터 분리하여 독립된 대목구로 설립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교회 창설과 더불어 끊임없는 박해속에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주문모 신부를 비롯, 수많은 순교자를 낳고 목자없는 교회가 됐던 조선의 교우들이 지하에서나마 자생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북경 주교와 교황청에까지 성직자 영입 운동을 끊임없이 호소한 결과였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마침내 이날 파리외방전교회로 하여금 전교 사업을 담당하게 함과 동시에 자원해서 조선에 가기를 간청한 브뤼기.. 2011. 4. 3.
(20) 이광재 신부 "뼛속까지 진정한 사제요 목자였어라!" ▲ 양양성당에 세워져 있는 이광재 신부 상. 준비된 사제 '8품 신부'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왔다. 1935년 차부제품을 받기 전이었다. 어렸을 때 다친 손가락이 문제였다. 광재가 9살 때였다. 낫으로 버드나무가지를 벗겨 버들피리를 만들려다 왼쪽 둘째 손가락이 덜렁거릴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다. 급하게 달려온 부모는 부목을 댄 후 칡덩굴로 칭칭 감아맸는데 다행히도 손가락이 붙고 상처가 아물었다. 하지만 자리를 잘못 잡아 마치 뱀 모양처럼 기형이 돼버렸는데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신학교 교수신부들은 회의를 열어 차부제품을 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마른 하늘에 날 벼락 같은 선고였다. 얼마 후 손가락이 정상이 아니긴 하지만 제병을 만지고 성체를 들어올리는 데에 지.. 2010. 6. 13.
(19) 방유룡 신부<하>" 한국적 순교 영성 토착화에 기여... 동양적 정신문화를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고양... 점성정신 바탕으로 침묵과 대월의 삶 강조... '면형무아'의 영성을 청년들에게 전파해 ▲ 1968년 8월 27일 방유룡 신부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들에게 종신서원 반지를 수여하고 있다. ▲ 방유룡 신부가 1960년 10월 27일 서울 청파동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원에서 자신의 사제수품 30주년 및 회갑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2006년 4월, 한국순교복자수녀회는 설립 60돌을 맞는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맞은 수녀회는 설립자이자 한국천주교회가 낳은 영성의 큰 스승 방유룡 신부를 기억하고자 소책자를 엮었다. 그 책이 방 신부 영적 어록인 「영혼의 빛」 가운데서 가려 묶은 「면형의 길」이라는 책으로, 손 안에 쏙 .. 2010. 3. 28.
(18) 방유룡 신부 (중) '면형무아'의 여정 따라서 ▲ 책상에 앉아 한창 집필 중인 창설자 방유룡 신부. 1946년 4월 21일. 좌우 대립이 극에 이른 혼란한 해방공간이었다. 당시 개성본당 주임으로 있던 방유룡 신부는 한국 순교자를 주보로 한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설립한다. 설립회원인 윤병현ㆍ홍은순 수녀와 함께였다. 자신의 생애를 변화시킨 결정적 회심이 있은 뒤 27년 만에 수도회를 설립한 방 신부는 수도회와 함께 나를 버리고 하느님과 하나되는 '면형무아(麵形無我)'의 여정에 들어간다. 수녀회 설립 직후 수도생활은 여러 모로 열악했다. 그럼에도 개성본당 부속 청석기와집을 임시 수도원으로 삼아 수도자들은 본당과 육영학교, 장미고등양재학원을 통해 사도직에 헌신했다. 1949년 6월 24일에는 개성 자남동에 자력으로 수녀원을 마련했다.. 2010. 3. 21.
(17) 방유룡 신부(상) 완덕의 길을 걸으며 한국적 수도원 설립 ▲ 방유룡 신부 가난과 함께 한 생애를 살아간 사제. 한결같은 침묵과 열심한 신앙으로 완덕의 길을 걸은 사제. 무엇보다 겨레 복음화와 한국적 수도원 설립이라는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한국천주교회에 영성의 큰 발자국을 남긴 큰 스승. 무아(無我) 방유룡(1900~1986) 신부였다. 방 신부는 특히 전 교회가 하느님 가족으로 살며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건설하는 꿈을 꿨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휘장은 형제애"라고 노래했고, 하느님 사랑의 불을 세상에 타오르게 하기 위해 순간의 놓침도 없이 사랑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수도회 주보를 한국 순교자로 정해 순교정신으로 이 사명에 신명을 다하도록 했다. 1900년 3월 6일 서울 정동에서 태어난 방 신부는 부친 방경희.. 2010. 3. 14.
(16) 윤을수(1907~1971) 신부(상), 한국의 첫 박사 신부 번역, 출간, 연학 등 학자적 자질 꽃피워 1939년 7월 프랑스 파리대학. 32살 동양인이 「한국유교사론」이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천주교회 첫 박사 사제인 윤을수(라우렌시오) 신부였다. 한국인들에게 유교 사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제시하려고 하는 의도를 저변에 깔고 있는 이 논문은 한국 유교사를 통시적으로 훑어보면서 특히 불교와 대비해 그 정치 사회적 영향을 짚어내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도 포착할 수 있다. 논문에서 제시하는 유교 사상이 가톨릭 사제인 저자의 삶과 사상에 어떤 관련이 있나 하는 것이다. 인보성체수도회 새감연구소장 한영순 수녀는 이렇게 표현한다. "「한국유교사론」에 나타난 한국사상에 대한 가톨릭적 이해는 인간중심 사상에 대한 이해와 사회복지 사상에 대한 것이다.. 2010. 2. 28.
(15) 윤을수 신부(하) : 인보(隣保)의 삶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 끝이 없어라 ▲ 윤을수 신부가 1953년 골룸바 어린이집 학생들과 미군부대 성당을 방문, 위문 공연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미국으로 건너간 윤을수 신부는 뉴욕 문화원 교수로 있으면서 이승만 박사와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창씨 개명을 거부하고 쫓기다시피 미국으로 건너간 터였기에 윤 신부는 미국 생활을 하면서 이 박사 독립운동에도 기여했다. 이는 이 박사가 귀국해서 직접 한 증언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 "…내가 미국에 있을 때…여기 있는 윤을수 신부와 메리놀 전교회 안 신부도 나와 같이 독립운동을 한 분들입니다…."(「경향잡지」 1948년 8월호 '독립 축원 미사성제'에서) 대신학교 성신대학장으로 윤 신부는 해방 후 3년 가까이 더 미국에 머물다 1948년 2월 귀국했.. 2010. 1. 31.
(14) 윤의병신부(상)(1889~1950, 납북 배움의 길 트고 성사 위해 수백리 길 다녀 소설 「은화(隱花)」. 기해박해 백주년이 되던 1939년 1월부터 1950년 6월까지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잡지인 「경향잡지」에 연재돼 수많은 신자들 심금을 울렸던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군난(窘難) 소설이다. 군난이란 교회 박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박해를 당하는 교회 편에서는 군난이라고 부른다. '알려지지 않은 순교의 꽃'이라는 의미를 지닌 「은화」의 저자 윤의병(바오로) 신부는 1989년 9월 27일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용리 산골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윤자호(바오로)의 5대손 윤상우의 5남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족을 따라 큰아버지가 사는 진천군 백곡면 용진골로 이사한 의병은 큰아버지 윤상운이 세운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다. 그리.. 2009. 12. 20.
(13) 정규량 신부(하) 6 25 전쟁 때도 피란가지 않고 신자들 돌봐 ▲ 위령성월을 맞아 용산 성직자묘역에서 기도하는 신자들. 제일 앞쪽이 정류량 신부 묘지다. [전대식 기자 jfaco@pbc.co.kr] 정규량 신부는 1924년 6월 6일 부여 금사리본당 제3대 주임으로 부임했지만 현지 사정은 좋지 않았다. 서천 지역 자근재, 송동, 독매 등 세 공소 교우들이 전임 신부의 유임 운동을 벌이는 바람에 빚어진 '자근재 사건'으로 신자들 사이에 불목이 심했던 것이다. 정 신부는 때로는 타이르고, 때로는 엄하게 꾸짖으며 불목하는 신자들을 진정시키고 화합으로 이끌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본당 내에 파벌이 있어서 서로 싸우고 있는데, 쉽게 진정될 것 같지 않습니다. 저는 장애물을 제거.. 2009. 1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