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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특집120

(20) 이광재 신부 "뼛속까지 진정한 사제요 목자였어라!" ▲ 양양성당에 세워져 있는 이광재 신부 상. 준비된 사제 '8품 신부'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왔다. 1935년 차부제품을 받기 전이었다. 어렸을 때 다친 손가락이 문제였다. 광재가 9살 때였다. 낫으로 버드나무가지를 벗겨 버들피리를 만들려다 왼쪽 둘째 손가락이 덜렁거릴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다. 급하게 달려온 부모는 부목을 댄 후 칡덩굴로 칭칭 감아맸는데 다행히도 손가락이 붙고 상처가 아물었다. 하지만 자리를 잘못 잡아 마치 뱀 모양처럼 기형이 돼버렸는데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신학교 교수신부들은 회의를 열어 차부제품을 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마른 하늘에 날 벼락 같은 선고였다. 얼마 후 손가락이 정상이 아니긴 하지만 제병을 만지고 성체를 들어올리는 데에 지.. 2010. 6. 13.
(19) 방유룡 신부<하>" 한국적 순교 영성 토착화에 기여... 동양적 정신문화를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고양... 점성정신 바탕으로 침묵과 대월의 삶 강조... '면형무아'의 영성을 청년들에게 전파해 ▲ 1968년 8월 27일 방유룡 신부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들에게 종신서원 반지를 수여하고 있다. ▲ 방유룡 신부가 1960년 10월 27일 서울 청파동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원에서 자신의 사제수품 30주년 및 회갑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2006년 4월, 한국순교복자수녀회는 설립 60돌을 맞는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맞은 수녀회는 설립자이자 한국천주교회가 낳은 영성의 큰 스승 방유룡 신부를 기억하고자 소책자를 엮었다. 그 책이 방 신부 영적 어록인 「영혼의 빛」 가운데서 가려 묶은 「면형의 길」이라는 책으로, 손 안에 쏙 .. 2010. 3. 28.
(18) 방유룡 신부 (중) '면형무아'의 여정 따라서 ▲ 책상에 앉아 한창 집필 중인 창설자 방유룡 신부. 1946년 4월 21일. 좌우 대립이 극에 이른 혼란한 해방공간이었다. 당시 개성본당 주임으로 있던 방유룡 신부는 한국 순교자를 주보로 한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설립한다. 설립회원인 윤병현ㆍ홍은순 수녀와 함께였다. 자신의 생애를 변화시킨 결정적 회심이 있은 뒤 27년 만에 수도회를 설립한 방 신부는 수도회와 함께 나를 버리고 하느님과 하나되는 '면형무아(麵形無我)'의 여정에 들어간다. 수녀회 설립 직후 수도생활은 여러 모로 열악했다. 그럼에도 개성본당 부속 청석기와집을 임시 수도원으로 삼아 수도자들은 본당과 육영학교, 장미고등양재학원을 통해 사도직에 헌신했다. 1949년 6월 24일에는 개성 자남동에 자력으로 수녀원을 마련했다.. 2010. 3. 21.
(17) 방유룡 신부(상) 완덕의 길을 걸으며 한국적 수도원 설립 ▲ 방유룡 신부 가난과 함께 한 생애를 살아간 사제. 한결같은 침묵과 열심한 신앙으로 완덕의 길을 걸은 사제. 무엇보다 겨레 복음화와 한국적 수도원 설립이라는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한국천주교회에 영성의 큰 발자국을 남긴 큰 스승. 무아(無我) 방유룡(1900~1986) 신부였다. 방 신부는 특히 전 교회가 하느님 가족으로 살며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건설하는 꿈을 꿨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휘장은 형제애"라고 노래했고, 하느님 사랑의 불을 세상에 타오르게 하기 위해 순간의 놓침도 없이 사랑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수도회 주보를 한국 순교자로 정해 순교정신으로 이 사명에 신명을 다하도록 했다. 1900년 3월 6일 서울 정동에서 태어난 방 신부는 부친 방경희.. 2010. 3. 14.
(16) 윤을수(1907~1971) 신부(상), 한국의 첫 박사 신부 번역, 출간, 연학 등 학자적 자질 꽃피워 1939년 7월 프랑스 파리대학. 32살 동양인이 「한국유교사론」이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천주교회 첫 박사 사제인 윤을수(라우렌시오) 신부였다. 한국인들에게 유교 사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제시하려고 하는 의도를 저변에 깔고 있는 이 논문은 한국 유교사를 통시적으로 훑어보면서 특히 불교와 대비해 그 정치 사회적 영향을 짚어내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도 포착할 수 있다. 논문에서 제시하는 유교 사상이 가톨릭 사제인 저자의 삶과 사상에 어떤 관련이 있나 하는 것이다. 인보성체수도회 새감연구소장 한영순 수녀는 이렇게 표현한다. "「한국유교사론」에 나타난 한국사상에 대한 가톨릭적 이해는 인간중심 사상에 대한 이해와 사회복지 사상에 대한 것이다.. 2010. 2. 28.
(15) 윤을수 신부(하) : 인보(隣保)의 삶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 끝이 없어라 ▲ 윤을수 신부가 1953년 골룸바 어린이집 학생들과 미군부대 성당을 방문, 위문 공연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미국으로 건너간 윤을수 신부는 뉴욕 문화원 교수로 있으면서 이승만 박사와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창씨 개명을 거부하고 쫓기다시피 미국으로 건너간 터였기에 윤 신부는 미국 생활을 하면서 이 박사 독립운동에도 기여했다. 이는 이 박사가 귀국해서 직접 한 증언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 "…내가 미국에 있을 때…여기 있는 윤을수 신부와 메리놀 전교회 안 신부도 나와 같이 독립운동을 한 분들입니다…."(「경향잡지」 1948년 8월호 '독립 축원 미사성제'에서) 대신학교 성신대학장으로 윤 신부는 해방 후 3년 가까이 더 미국에 머물다 1948년 2월 귀국했.. 2010. 1. 31.
(14) 윤의병신부(상)(1889~1950, 납북 배움의 길 트고 성사 위해 수백리 길 다녀 소설 「은화(隱花)」. 기해박해 백주년이 되던 1939년 1월부터 1950년 6월까지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잡지인 「경향잡지」에 연재돼 수많은 신자들 심금을 울렸던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군난(窘難) 소설이다. 군난이란 교회 박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박해를 당하는 교회 편에서는 군난이라고 부른다. '알려지지 않은 순교의 꽃'이라는 의미를 지닌 「은화」의 저자 윤의병(바오로) 신부는 1989년 9월 27일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용리 산골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윤자호(바오로)의 5대손 윤상우의 5남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족을 따라 큰아버지가 사는 진천군 백곡면 용진골로 이사한 의병은 큰아버지 윤상운이 세운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다. 그리.. 2009. 12. 20.
(13) 정규량 신부(하) 6 25 전쟁 때도 피란가지 않고 신자들 돌봐 ▲ 위령성월을 맞아 용산 성직자묘역에서 기도하는 신자들. 제일 앞쪽이 정류량 신부 묘지다. [전대식 기자 jfaco@pbc.co.kr] 정규량 신부는 1924년 6월 6일 부여 금사리본당 제3대 주임으로 부임했지만 현지 사정은 좋지 않았다. 서천 지역 자근재, 송동, 독매 등 세 공소 교우들이 전임 신부의 유임 운동을 벌이는 바람에 빚어진 '자근재 사건'으로 신자들 사이에 불목이 심했던 것이다. 정 신부는 때로는 타이르고, 때로는 엄하게 꾸짖으며 불목하는 신자들을 진정시키고 화합으로 이끌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본당 내에 파벌이 있어서 서로 싸우고 있는데, 쉽게 진정될 것 같지 않습니다. 저는 장애물을 제거.. 2009. 11. 29.
(12) 정규량 신부(상) 아름다운 갈매못 순교성지의 '아버지' ▲ 정규량 신부가 순교성지임을 확인하고 20평 부지를 매입해 기초를 놓은 갈매못 순교성지.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갈매못성지. 103위 순교성인 중 다블뤼 안 주교, 위앵 민 신부, 오매트르 오 신부와 장주기 요셉, 황석두 루카 등 5위 성인이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곳으로 특히 석양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바닷가 순교성지다. 갈매못성지가 오늘날처럼 아름다운 순교성지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80여 년 전 한 사제가 헌신적 노력을 기울여 갈매못 순교지를 확인하고 부지를 매입해 놓았기에 가능했다. 순교자의 후예임을 긍지로 삼고 평생을 산 정규량(레오, 1883~1952) 신부가 그다. 갈매못성지가 있는 오천은 서해안 천혜의 항구로, 조선시대에는 수군절도사가 주둔.. 2009. 11. 22.
(11) 김양홍 신부(1875~1945년) 전주교구 자립 터전 닦은 초대교구장 김양홍 신부 "그는 성인 신부다." "그는 사려 깊은 사람이며 정확한 판단력을 가졌다." "그는 몸이 아프면서도 어느 대축일 전날 고해소를 떠나지 않고 성사를 주다가 쓰러져서 신자들이 그를 방으로 옮기고 나서야 자기가 쓰러진 것을 알았다." 1931년 5월10일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에게서 초대 전라도 감목 대리로 임명된 김양홍(스테파노,1875~1945) 신부에 대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증언이다. 함께 전라도 지역을 사목했던 보두네ㆍ미알롱ㆍ베르몽 신부에 따르면 김양홍 신부는 교우들을 지극히 사랑하여 책망을 들어 마땅한 사람을 꾸짖을 때도 마음 상하지 않게 할 줄 아는 사려깊은 사제였다. 한국인 첫 감목대리인 그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모두 떠난 전라도와 제주도 지역을 관장.. 2009. 11. 15.
(10) 10번째 사제 홍병철 신부 가시밭길도 올곧은 마음으로... 청주 출신 첫 사제이자 한국천주교회 열 번째 사제로 수품... 옥천본당 초대주임으로 옥천공동체 일궈 ▲ 홍병철 신부 ▲ 말레이반도 페낭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한국인 신학생들이 1892년 귀국, 서울 약현(현 중림동약현) 성당에 모였다. 맨 왼쪽이 홍병철 루카 신학생이다. ; 끼니는 성당 주변에 호박 등을 심고 이를 거둬 죽을 먹으며 때웠다. 쌀은 단 한 톨도 입에 대지 않았다. 손님이 올 땐 손수 보리 방아를 찧어 대접했다. 식복사는 두지 않았다. 이렇게 아낀 돈은 성당 인근 논밭을 구입하는데 썼다. 극도의 근검절약을 통해 1만 평에 이르는 논밭을 매입, 주민들에게 소작을 주고 여기에서 소출되는 양곡은 입에도 대지 않고 공동체와 함께하고 이웃과 나눴다. 일제 경제 침략.. 2009. 10. 25.
(9) 김원영 신부(1869~1936) "복음전파, 단호하고 강직하게 " 한국교회사연구소는 1997년 「제주 천주교회 100년사」 간행 작업 중 오래된 책자 한 점을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다. 제주도에 첫 한국인 사제로 부임한 김원영(아우구스티노) 신부가 1901년에 집필한 「수신영약(修身靈藥)」 한글 필사본이다. 총 43장 분량의 「수신영약」에는 천주교 교리 특징, 천주교에 대한 제주민들의 의식, 제주도 풍습과 미신 등 사료 가치가 높은 글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구한말 가톨릭과 토착종교(민간신앙)의 충돌을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자료다. # 미신 척결 없이 복음화 여렵다 1899년 사제품을 받고 곧바로 제주도에 도착한 김 신부는 섬 전역에 만연한 미신 숭배에 혀를 내둘렀다. 제주 사람들은 뱀을 '칠성(七星)할망'이라며 숭배하고, 집에 불.. 2009.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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