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교회와 영성]/특집120

(8) 김성학 신부(1870-1938) 경북 교육사업과 평양교구 초석 다져 ▲ 김성학 신부 "공경하올 주교님, 가실(현 경북 왜관읍 낙산본당)에는 교우가 매우 적어 주교님께서 제게 학교를 세울 의향이 없느냐고 물으셨을 때 학교를 세울만한 학생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간 여러 사람들이 이사해왔고 최근 영세한 사람들이 만일 제가 학교를 세우면 자기 자녀들을 보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교님께 상의드리오니 예산이 남으셨으면 다른 곳에 보내신 것처럼 제게도 일부만 보내 주십시오. 저도 학교를 세우고 싶사오며 그것이 제게도 매우 이로울 것 같습니다." 1898년 가실본당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성학(알렉시오) 신부는 부임 이듬해인 1899년 가실에 학교를 세우겠다는 뜻을 담은 서한을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 꿈은 .. 2009. 9. 20.
(7) 강성삼 신부(다섯 번째 사제) 부산 경남지역에서 활약한 첫 한국인 사제... 사목에 전념하다 풍토병으로 7년 만에 선종 ▲ 강성삼 신부 ▲ 1928년 낙성식 직후 명례성당에서 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성당은 1935년 태풍으로 전파됐고, 현 공소 성전은 1938년 무너진 자리에 축소 복원했다. "지극히 존경하올 주교님, 절영도(현 부산광역시 영도구에 속한 섬)에서 밀양으로 이사를 온 다음 곧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 늦게나마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집은 120냥에 샀습니다. 방이 셋뿐이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장 새로 집을 한 채 짓기로 작정했습니다. 네 칸 짜리 집입니다만, 아직 착수는 하지 않았습니다. 땅이(추위가) 풀린 다음에 시작할 예정입니다."(「천주교 마산교구 40년사」 486쪽) 강성삼(라우렌.. 2009. 8. 30.
(6) 한국천주교회 네 번째 사제 정규하 신부 ▲ 정규하 신부 ▲ 정규하(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신부가 동기 강도영(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신부의 은경축을 축하하고자 동료 사제들과 함께 1921년 미리내성당 마당에 모였다. 수품 연월일이 같으면 나이 순에 따르는 교회 관습에 따라 강 신부는 세 번째, 정 신부는 네 번째 사제로 한국천주교회사에 기록됐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전후,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풍수원성당엔 의병들이 수시로 찾아들었다. 일본군과 싸우다 쫓기던 터였다. 그런데도 정규하 신부는 이들을 물리치지 않고 따뜻이 맞아들여 침식을 제공해주며 격려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또 본당 신자들 가운데서도 의병에 가담, 일본군과 항쟁하다가 순국하는 이들이 많았다. #의병들의 전국적 항거에도 망국의 치욕을 당하자 정 신부는 1910년 나라의 .. 2009. 8. 23.
[몽골 선교 현장을 가다'] <2> 초원에 싹트는 신앙 성전 생기자 신자들 하나둘 모여들고 - ‘집이다!’ 몽골 항올본당에 도착한 김성현 신부는 제일 먼저 성모당을 찾아 성모님께 인사를 올렸다. ‘어머니, 잘 다녀왔습니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 한 달여의 모금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김 신부를 예비신학생 산자와 몽골인 선교사 자야가 반갑게 맞는다.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 된 산자는 김 신부가 처음 울란바토르에 와 함께 기도하던 아이들 중 하나다. 김 신부가 몽골지목구장 웬체슬라오 S. 파딜랴(Wenceslao S. Padilla) 주교의 명에 따라 항올본당 설립 임무를 맡았던 2001년 신자도 선교사도 성전 건립기금도 하나 없던 시절, 김 신부는 자신의 곁으로 모여든 아이들의 눈망울에 희망을 심었다. 몽골인들의 집집마다 찾아가 문을 두드리지도, 선교 책자를 .. 2009. 7. 19.
(3) 최양업 신부(상) 13년 만의 귀국 칠흑같은 조선에 돌아온 '복음의 발' ▲ 최양업 신부 #1. 1849년 12월 말 조선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중국 봉황성 변문.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스승이자 선배 사제인 매스트르 신부와 아쉬운 작별을 한 채 조선 땅으로 걸음을 옮겼다. 둘이 함께 조선 입국을 시도한 게 벌써 몇 번째였던가. 하지만 벽안의 이국인 사제가 철통같이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들키지 않고 조선 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 자체였다. 이윽고 조선 땅 의주 관문이 눈앞에 보였다.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칠흑같이 캄캄한 밤, 세찬 광풍이 휘몰아쳤고 혹독한 추위에 온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 잠입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밤이었다. 최 신부와 밀사들이 관문 한복판을 지나쳤는데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마침내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2009. 7. 19.
(2) 김대건 신부(하) 영성 삶의 나침반 '마리아 신심' ▲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새남터(서울 용산구 소재)에 세워진 새남터성당.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대건 신부의 사제생활은 1년 남짓에 불과했다. 꽃을 피우기도 전에 꺾이고 만 셈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김 신부의 사목활동과 관련된 기록은 거의 없다. 다행히도 김 신부는 20여 통에 달하는 서한을 남겼다. 서한은 모진 박해 속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굳센 신앙을 잃지 않고 순교의 칼날을 받아들인 김 신부의 신앙관을 잘 보여준다. 서한을 중심으로 김 신부의 영성을 살펴본다. ▨임자 하느님 김 신부가 하느님을 얼마나 깊이 믿고 따랐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서한부터 읽어보자. "온갖 세상 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 2009. 7. 19.
(1) 김대건 신부(상)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신앙 껴안고 형장의 이슬로 ▲ 성 김대건 신부 한국교회 사제 수가 최근 4000명을 넘어섰다. 신자도 500만 명을 훌쩍 넘겼다. 세계 어느 나라 가톨릭교회와 비교해봐도 자랑스러운 우리 자화상이다. 이땅에 복음이 전파된 것이 불과 230여 년 전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거저 주어지는 것이 있을까. 모진 박해 속에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과 묵묵히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신앙 선조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제의 해'를 지내면서 오늘의 한국교회를 일군 사제들의 삶과 영성을 조명하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첫 번째 사제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7월 5일)의 주인공 성 김대건 신부다. 한국교회 첫 사제 김대건 신.. 2009. 7. 19.
[몽골 선교 현장을 가다'] <1> '초원의 사제' 김성현 하느님 손길로 초원 위에 세워진 성전 - 10년째 몽골에서 선교활동 중인 김성현 신부가 몽골 종모트에 건립 중인 새 성전을 가리키고 있다. ‘잔고 50달러!’ 통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김성현 신부(대전교구 몽골 선교사제)는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300명 넘는 몽골 항올본당 식구의 목숨이 달렸다. 당장 주일미사에 오는 아이들에게 나눠줄 따뜻한 차와 빵을 살 돈도 부족하다. 밤 열두시를 훌쩍 넘긴 시간, 김 신부는 성당 앞마당 성모동굴 앞에 섰다. 초여름밤의 몽골 하늘, 적막함 속에 별이 빛나고 있다. ‘하느님이 이끌어주시겠지….’ 가방을 꾸렸다. 다음날 밤 12시20분,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김 신부, 창문 밖으로 펼쳐진 몽골 울란바토르 시내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종모트(몽골 항올본.. 2009. 7. 12.
(4) 따리 불교국에 꽃핀 가톨릭 신앙 바이족 전통 양식 따른 따리성당, 전교원으로 사제 양성에 힘써 ▲ 나시족 상형문자가 새겨진 암벽 뒤로 옥령쉐산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차마고도의 하늘 차마고도 하늘은 코발트 빛깔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하늘은 가까웠고 호흡이 가빠졌다. 격심한 두통과 끊이지 않는 기침이 준비되지 않은 몸을 축 늘어뜨린다. 고산증이다. 구토를 하더니 코피까지 터졌다. 수첩과 카메라만 챙긴 배낭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사람만 고산증을 겪는 것이 아니었다. 인스턴트 식품 포장 비닐이 빵빵하게 부풀어 터질듯하고, 화장품은 뚜껑을 여는 순간 주르르 흘러내린다. 치중(茨中)성당 교우들과 헤어진 일행은 삼대(三代)가 선업을 쌓아야 한번 볼까말까 한다는 매리쉐산(梅里雪山)의 최고봉 카와카보(6740m)를 둘러본 후 바이망쉐산(.. 2009. 6. 21.
(3) 순교자의 땅 치중성당 하늘과 맞닿은 그 곳, 신앙의 샘 고이 흐른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화 물결 1921년 완공된 치중성당, 가톨릭 문화 토착화 전형 농산물로 봉헌, 사제 양식으로…장족말 미사 전례 ▲ 동서양 건축양식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치중성당. 적막산중인 치중에 이 성당을 보기 위해 많은 외국인들이 찾아오고 있다. 순교자의 땅 치중(茨中)은 잊힌 선교루트 자취를 따라 찾은 차마고도 환상을 충족시켜 주었다. 장구한 티베트 문화를 누려왔던 이 땅은 '아늑한 분지'라는 뜻의 티베트 말 '치중'과 딱맞아 떨어진다. 더칭(德淸)에서 약 80여km 떨어져 있다. 오늘날 티베트인 시짱(西藏)자치구 얜징(鹽井)마을과 인접한 이곳은 매리쉐산(梅里雪山)과 바이망쉐산(白茫雪山)이 동ㆍ서 그리고 북쪽으로 둘러싸고 있고.. 2009. 6. 7.
(2) 가장 험한 선교 루트에서 산사태를 만나다 "조금만 차가 빨리 달렸다면 큰 사고 당할 뻔" 인류 최고(最古) 교역로 '차마고도'(茶馬古道)로 가는 길은 멀었다. 이번 기행의 시작지인 중국 윈난성(蕓南省) 리장(麗江)은 한국에서 직항기가 없어 인천공항에서 밤 비행기로 쿤밍(昆明)에 도착한 다음, 베이징(北京)에서 온 김상진(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신부와 통역 박철진(베네딕토)씨를 만나 공항에서 5시간 여를 기다렸다 새벽 첫 비행기로 겨우 닿은 곳이다. 꼬박 하룻밤을 새운 셈이다. 짐을 찾아 리장공항을 나오자 우리 일행을 태우고 일주일간 차마고도 곳곳을 누빌 승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우리 일행을 보자마자 "첫 목적지인 치중(茨中)까지 560여km 거리라며 쉬지 않고 달려도 10시간은 더 걸릴 것"이라며 재촉했다. 해발 4000m 넘는.. 2009. 5. 24.
(1) 르포를 시작하며 선교사 오가던 관문, 복음화 새 희망으로 떠올라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이 땅에 그리스도의 평화를 실현한다는 이념으로 창립된 평화방송ㆍ평화신문이 21돌을 맞았다. 평화신문은 지난 21년간 '선교지의 전통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고 토착교회를 건설하라'는 교회 가르침에 따라 우리 민족과 문화 복음화에 혼신의 힘을 쏟아왔다. 아울러 한국 천주교회가 아시아를 비롯해 세계 복음화의 주역 교회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하고 제시하기 위해 세계 각국 교회를 취재 보도해 왔다. 평화신문은 특히 올해 창간 21돌을 맞아 한국 가톨릭 언론 역사상 최초로 '차마고도 지역 가톨릭 교회들'을 찾았다. 서방에 '티로드'(Tea Caravan Rou te)로 알려진 차마고도는 '비단길'(Silk Road) 보다 200여 년 앞.. 2009. 5. 24.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