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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10. 해성보육원 개원과 봉사를 통한 선교활동

by 세포네 2007. 3. 18.


10. 해성보육원 개원과 봉사를 통한 선교활동

현재 인천지역 유일한 국내입양전문기관으로 자리잡고 있는 해성보육원의 시작은 1894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돌봐줄 이 없게 된 고아들을 수녀원으로 데려와 키운 봉사활동에서 비롯되었다.

지난주 주보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1894년 수녀원이 설립되고 지역민들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수녀들은 환자 간호 활동과 더불어 4살 된 교우 여자 아이와 12살 된 여자아이를 수녀원에 데려와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5년 4월에는 2살 된 남자 아이도 데려와 수녀원의 방 하나를 비워 키웠다. 이렇게 어려운 아이들을 데려와 돌보는데서 시작된 인천에서의 *성영회 사업은 의료봉사 활동처럼 활발하게 커져갔다. 

당시 손길을 필요로 하는 어린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1895년에는 15명, 1897년 40명으로 하여 1900년에는 보육원 아이들이 100명을 넘어섰다. 해마다 50명에서 100명의 아이들이 입회하게 되어 수녀들은 더 많은 재원과 일손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성영회 본부로부터 더 이상의 재원이 보조되지 않았기에 수녀들은 인천의 성영회에서 보살필 고아의 수를 100명쯤으로 제한할 수 밖에 없었다. [성영회 : 1843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된 버림받은 아동들을 위한 구제 사업 기관. 우리나라에는 매스트르신부가 성영회 본부에 죽음에 직면한 고아를 위한 재정적인 원조를 청하여 1855년경 시작되었다. 병인박해로 중단되었다가 1880년에 재개되어 1886년부터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인계되었다. 성영회의 사업은 개화와 더불어 전국의 주요 도시로 퍼져갔고, 직업교육을 통해 자립의 길을 열어주는 근대적인 고아 구제 사업으로 발전해 갔다.]

이처럼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수녀들의 활동은 자연스럽게 선교로 이어졌다. 해성보육원 아이들 뿐만 아니라 이보다 먼저 시작된 무료진료소 의료봉사는 이웃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무료 진료소를 찾아오는 환자들이나 가정방문 치료를 받는 환자들에게 보여준 수녀들의 헌신적인 보살핌에 대한 고마움과 호평이 인천을 중심으로 놀라울 만큼 널리 전해졌다. 어떤 환자들은 가마를 타고 또는 지팡이를 짚고 며칠씩 걸어 진료소를 찾아왔다. 1897년 8월부터 9개월 동안 무료진료소를 찾은 환자는 2400명, 환자가정 방문 치료는 253명이었다. 수녀들의 도움을 받는 환자의 수는 계속 증가하여 1899년에는 가정방문 환자 435명, 무료진료소 방문 환자는 5400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이처럼 매년 5000여명의 환자들이 치료를 받았다.

이 해에 답동본당(당시 제물포본당)은 155명의 성인이 영세하고 88명의 교우 자녀가 영세 또는 보례를 하여 750명의 교우수를 기록했는데, 성영회의 95명 아이들까지 합하면 교우수는 845명이나 되었다.  <정리:홍보실, 참조:인천교구사>

 

좌) 고아원의 남아들(1900년경)
우) 고아원의 여아들(1921년). 당시 원아수는 남자가 2명, 여자가 37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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