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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13. 답동 성당 3개의 종 축성

by 세포네 2007. 4. 15.


13. 답동 성당 3개의 종 축성

1900년 주로 항구에 사는 교우들의 기부금으로 외국으로부터 종을 주문하여 답동 성당에 3개의 종이 들어오게 되었다. 1897년 성당 건물을 완공하여 축성했지만 당시에는 뾰족한 종탑만 있을 뿐 종은 설치되지 않았다. 1900년 4월 17일 드디어 종이 설치되고 종 축성식을 하였다. 탄압이 심했던 시기에 많지 않은 교우들의 힘으로 마련한 종이었기에 종소리가 인천 하늘에 울려 퍼졌을 때 신자들은 커다란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일제 탄압이 강해지면서 답동성당의 아름다운 종소리를 듣지 못할 위기가 닥쳐왔다. 

일제말기에 사제들의 감금 탄압은 그치지 않고, 신학교와 성당, 병원은 징발하여 고사포 진지로 만들며, 성당에는 일장기를 게양하게 하고, 성당의 종도 무기를 만든다며 가져가는 등 수난이 계속되었다. 

답동성당의 종도 헌납하기를 강요받았다. 임종국 신부는 그 종은 축성된 것이라 뗄 수도, 다른 용도로 쓰일 수도 없다고 거절하였으나 일제는 들어주지 않았다. 

이 때 평양에서 양기섭 신부가 전쟁을 위해 성당 종을 헌납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자 할 수 없이 노기남 주교도 종의 헌납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임신부는 새로운 묘안, 즉 건물 구조상 가운데 큰 종은 떼더라도 내려올 수가 없으며 나머지 두 개는 가능하다는 뜻을 전했다. 이에 일본 관헌은 두 개라도 좋으니 어서 떼라고 하였다. 

임신부는 그 종은 도저히 다른 목적으로는 사용될 수 없으니 하나는 해안동 쪽에 또 하나는 숭의동 쪽에 설치하여 비상시에 울려 시민들이 경계태세를 갖추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여 일제의 승낙을 얻어내었다. 그리하여 그 종들은 해방과 더불어 무사히 답동 성당에 돌아왔고, 현재까지 역사의 숨결이 전해지는 세 개의 종이 답동 성당 종탑에 보존되게 되었다. 세 개의 종에는 기증자들로 추정되는 이름과 당시 교황인 레오 13세, 답동 주임 마라발 신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3개의 종(鐘), 1937년 축성된 새성전, 종탑에 3개종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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