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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1954년 고잔 공소와 민종황 요한

by 세포네 2007. 3. 11.

1. 1954년 고잔공소를 건설하고 있는 신자들. 2. 1965년 고잔성당
3. 현재 남아있는 고잔공소 건물  4. 고잔성당 현재 모습

 

1954년 고잔 공소와 민종황 요한 

교세가 점차 증가하여 집에서 공소예절 드리기가 어려워지자 신자들은 자발적으로 부지를 매입하고 공소 건물을 준공하였다. 위 왼쪽 사진은 1954년 고잔 공소의 모습으로 여신자들이 대야에 모래를 퍼다 나르고 신대건 신부(주안1동 1대 주임)도 공사에 직접 참여하여 3개월만에 50여평의 공소 건물을 준공하였다.(1921년 답동 성당의 정식 공소로 설정, 1965년 2월 28일 본당 승격) 위 오른쪽 사진은 현재 마리아 집으로 남아있는 옛 고잔공소이다.

고잔, 그 신앙의 시작은 민종황(요한)과 그의 아들 민선훈(요셉)이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현재의 남동구 논현동 호구포 부근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1868년 당시 민종황은 이웃의 밀고로 호구포 붉은 북지(현 한국화약 사택 뒷산)에서 35세의 나이로 치명하였다.(치명터로 알려진 한국화약 사택 뒷산은 현재 72만평 부지 중 상당부분이 아파트 단지 건설중이며 고잔 성당이 그 부근의 유일한 언덕이다.) 이에 당시 17세의 민선훈은 부친의 시신을 치명장소 옆에 몰래 가매장한 후 숨어 지내며 수학에 전념, 문과에 급제(6품 통훈대부)하였다. 그리고 1881년 인천부 감리로 부임했다. 민선훈은 인천부의 감리로 있으면서 사유지 3정보를 답동성당의 건축부지로, 기부하는 셈으로 엽전 25냥(2만 5천원)에 팔았다. 1901년 중추원의관으로 임명받아 1904년 이 관직을 마지막으로 낙향하여 부친이 치명한 곳과 가까운 고잔동 괴화부락에 정착하였다. 이후 민선훈은 신앙전파에 주력하여 1907년 답동성당의 드뇌신부가 집전한 가정미사에 30여명의 신자가 참석하였다.(1982년 민선훈의 아들 민재익 베드로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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