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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14. 답동 본당 드뇌 신부의 선교·교육·의료활동

by 세포네 2007. 4. 22.

14. 답동 본당 드뇌 신부의 선교·교육·의료활동

답동성당이 명실상부한 선교의 거점으로, 그리고 인천 지역의 역사적인 건축물로 떠오르게 된 것은 1904년부터 1937년까지 무려 33년간이나 주임신부로 활동했던 제4대 전학준 으제니오 드뇌(全學俊, Eugene Deneux)신부 때부터다. 

 

드뇌신부는 1899년부터 본당에 거주하면서 제3대 주임 마라발 신부를 도와 사목을 함께 했던 터라 본당과 인천지역 사정에 누구보다 밝았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일본인들의 교회부지 침입으로 인해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였다. 당시 일본인들은 답동 본당 부지를 침범하여 일본식 건축으로 집을 짓고, 본당에서 경계표시로 설치한 돌 표지판을 뽑아내는 등 부지에 대한 분쟁이 많았다. 드뇌 신부는 건축 공사를 중단시키고 뮈텔주교에게 사정을 보고하거나 프랑스 공사관에 제소하여 모든 부지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였다.

부임당시 드뇌신부에게는 답동 본당과 영종외에 대골공소도 맡겨졌다. 드뇌신부는 특별히 전교에 힘써  1910년까지 구월리, 고잔, 새말(현 시흥군 소래읍 대야리), 부평공소, 1911년 새골(현 인천시 남구 만수동 새골), 1912년 대야동, 1918년 남동, 1923년 신창리(현 인천시 중구 신창동), 1925년 강화, 그리고 1928년 온수리 공소를 설립했다

또한 교육을 통한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도 주력하여 1909년에는 마라발 신부가 신자들과 가난한 이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1900년에 설립한 인천항 사립박문학교를 맡아 학교 운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17년 4월 2일 남자부와 여자부를 합하여 ‘인천박문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설립자 겸 초대 학교장으로 취임했다. 교회 학교는 많은 외교인 학생들을 입교시키고 그 학생들의 가족까지 입교시키는 성과를 올렸으므로 선교를 위한 필수적인 사업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드뇌 신부는 사재(私財)로 용현동, 영종도 등지에 20여만 평의 농토를 마련하여 해성보육원에 기증하여 보육원 운영을 위한 재정적 기반을 탄탄히 해주었다. 또한 죽어가는 사람들과 극빈자들을 위한 병원의 필요성을 느껴 1938년에는 해성병원(1935년 개설)의 병원용 건물 신축에도 적극 협력하였다. 

드뇌 신부는 1915년 2월 1일, 본당을 바오로 성인에게 봉헌하고 6월 30일을 본당 주보축일로 정하였다. 1933년 신자수가 1500여명에 육박하게 되자 1935년부터 성전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개축작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신자들은 가난하여 교무금과 헌금을 별로 할 수 없었기에 드뇌 신부는 어렵게 공사를 진행해 나갔다. 공사 착공 4년 2개월만인 1937년 6월 30일 서울교구 라리보(1933∼1940년 재임) 주교 주례로 축성식을 가졌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답동 본당이다.

이처럼 드뇌 신부는 33년의 재임기간 동안 선교, 교육, 의료 활동을 통해 많은 업적을 남겼을뿐 아니라 사재를 내놓아 본당 발전을 위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해 놓았다.  가난한 이들과 답동 본당을 위해 헌신한  드뇌신부의 뜻은 명실공히 인천교구의 주교좌 본당으로 우뚝 선 답동성당에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해성병원(1938년경)

 

 

1937년 축성 당시 답동성당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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