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이상 된 성가정 상본(크기-가로 35cm 세로 48cm): 위의 상본은 가좌동 본당의 여섯 세대 교우 중 한 분의 소장품으로 6.25사변 당시에도 어떤 재산보다 소중히 보관해 온 것이라 전하였다.
▲1984년 8월 본당 승격 첫 미사
▲1987년 5월 성전 신축 기공식 미사
여섯 세대의 교우 모임에서 시작된 가좌동 본당
100년 된 가재가 나왔다하여 가재올(올=마을)이라 불렸던 가좌동의 첫 신앙공동체는 1983년 진주아파트와 주공아파트 1단지에 살던 여섯 세대의 교우들이 54일 묵주기도를 시작하며 이루어졌다.
3km가 넘는 비포장 도로를 오가며 석남동 본당으로 미사참례를 해야 하는 불편함 속에서도 교우들은 결속을 위해 노력하였고 주변의 본당으로 각자 미사 참례 다니던 교우들을 한 공동체로 모아 들였다.
그 결과 1983년 4월 23일 진주 아파트 2동 501호에 가좌공소가 설정되었고 교우들은 주일 새벽마다 수도회의 신부님을 모셔와 주일미사를 봉헌했다.
같은 해 9월 가좌동 83번지 미주 목욕탕 3층으로 공소를 이전하면서 신자들은 냉담자 방문 등 신자 찾기에 적극 동참하고 성모회, 성가대 창립, 예비자 교리반 개설, 공소 사목회 발족 등 하나의 공동체로서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하는 동시에 본당 승격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이러한 신자들의 단합된 노력으로 4월 첫 미사때 100여명이었던 신자수가 11월에는 200여명으로 늘어났고 드디어 1984년 8월 15일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염전과 전답 위에 조성된 가좌동 본당이 몇몇 교우들의 작은 모임을 시작으로 공소가 설정된 후 1년여만에 본당으로 승격될 수 있었던 것은 신자들의 일치된 신앙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가톨릭과 교리] > 다시보는인천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교터에 피어난 신앙, 강화 성당 (0) | 2007.06.03 |
---|---|
20. 한국학생들을 위해 설립된 여학교, 박문여자중고등학교 (0) | 2007.06.03 |
19. 한국전쟁과 답동본당의 수난 (0) | 2007.05.27 |
부평지역 첫 공소로 설정된 산곡동 본당 (0) | 2007.05.22 |
18. 인천가톨릭학생회의 전신, 용심회 (0) | 2007.05.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