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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16. 애덕의 실천과 복음선포를 겸행했던 인천 해성병원

by 세포네 2007. 5. 5.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서 의료사도직 분야에 직접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고아원의 운영이었다. 당시의 고아원에서는 병약한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여 이들에게 세례를 주며 간호했다. 1893년 장질부사가 인천 항구에서 번지기 시작해서, 아무런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쓰러지는 환자가 많았다. 답동본당 드뇌 신부는 가난한 자들을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 손수 간호하며 돌보기 시작했지만 환자수가 많아 본당 사목과 겸하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그래서 본당 일을 돌보는 수녀들의 힘을 빌려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약을 무료로 주거나 근소한 값을 받기도 하고,  집에 직접 방문하여 치료해주며, 위험한 이는 대세를 주는 등 진료소로서의 역할이 점차 커졌다.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인천분원에서는 1894년 해성보육원을 개원하면서 무료진료소를 본격적으로 운영해 나갔다. 그 후 1935년 해성보육원에 아일랜드의 필로메나 수녀가 내한하면서 차츰 진료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인천의 진료소를 ‘해성보육원 부속 해성병원’으로 개설했다. 이렇게 시작된 해성병원은 처음에는 이름만 병원일 뿐 아주 보잘 것 없는 진료소, 시약소 구실밖에 못했다. 그러나 1938년 10월 15일에 드뇌 신부의 도움으로 공사비 3만여 원을 들여 130여 평의 3층 현대식 건물을 신축하여 병원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해성병원에는 의사 수녀가 없어 일반의사들이 와서 진료를 하였는데 필로메나 수녀의 헌신적인 봉사로 인해 모두들 한 마음으로 협력하였다. 해성병원에는 16개의 크고 작은 방이 있었는데 주로 보육원 아동들을 위한 시설이어서 입원시설 없이 진찰과 시약만 하였다. 시약할 때에 물약을 음료수 병에다 담아 종이로 마개를 해 주어도 모든 사람이 불평 없이 병원을 애용하였다 한다. 

무료진료소 운영 당시 수녀들의 진료는 원칙적으로 무료였다. 그러나 치유된 환자들 중에는 간혹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닭 세 마리와 달걀’같은 현물을 가져와서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수녀들이 의료사도직의 실천을 통해 진정으로 보람을 느꼈던 일은 물질적 감사의 표시가 아니라 치료받은 환자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이 시기 의료사도직이 지향했던 진정한 목적을 확인할 수 있으며, 직접선교와 간접선교를 굳이 구분하기 어려운 것으로서 복음에서 가르치는 애덕의 실천과 직접적인 복음선포를 겸행했던 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사도직의 실천을 통해 교회의 발전에 기여했고, 교회에서 운영하는 본격적 의료기관의 출현을 촉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정리:홍보실, 참고자료:인천교구사,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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