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백마장 공소 앞에서: 앞줄 중앙이 1957년 신학원을 수료하여 공소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친 박양순 요안나 자매
▲산곡동 본당 축성식 후 : 나 굴리엘모 주교님과 태의선 로마노 신부님, 축하공연을 펼친 어린이들
산곡동 본당은 1970년에 설정되었지만 그보다 훨씬 전인 해방이전부터 부평지역에 처음 생긴 공소로서 신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라틴어 미사와 일본어 강론이 강요되던 때에 백마장에 거주하던 7~8가구의 신자들이 한 교우의 집에 모여 주일모임으로 미사를 대신하며 신앙생활을 해 나갔고, 해방이 되자 정식으로 답동 본당 백마장 공소로 발족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산곡동 인근지역에 미군기지가 들어와 당시 공소예절에 참여하는 미군들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산곡동 본당은 일찍부터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사목을 펼쳐왔다. 주변에 공단이 인접하여 근로자들이 많았던 산곡동 본당은 주민들에게 열려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ㄱ자 모양으로 생긴 성전의 특성을 이용하여 한쪽은 독서실로 한쪽은 예식장으로 개방하였다. 주민들은 성당을 가깝게 드나들었고 전교에도 도움이 되었지만 늘어나는 신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십 여년 만에 독서실과 예식장을 폐지하였다.
한편 공소 시절부터 친목단체로 모임을 가져온 ‘십자매’ 회원들은 모임 때 마다 얼마의 돈을 저축하여 본당의 주보인 성가정 동고상을 봉헌했다. 열 명 자매들의 작은 정성으로 마련된 성가정상은 1970년 9월 26일 축성식을 거행하여 지금까지 성당 입구에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다.
산곡동 본당은 부평지역에 처음 생긴 공소였다는 의미도 크지만 그 보다 더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도 의미가 있다. 미군들과 함께하는 공소예절, 지역민들을 위해 개방한 성당, 자매들의 정성으로 마련한 동고상까지…. 작지만 아름답게 꽃피워온 신앙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 산곡동 본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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