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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유년기의 추억

by 세포네 2009.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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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갔지만 신부될 생각은 없어"

 

<=  1. 1934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 시절의 소년 김수환(앞줄 왼쪽에서 3번째).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어 소신학교에 들어갔을 뿐 신부가 될 생각은 없었다.

2. 어머니(서중하 마르티나, 앞줄 왼쪽에서 4번째 안경쓰신 분)는 성품이 무척 곧으셨다. 그런 어머니 무릎에서 신앙과 삶의 자세를 배운 것에 늘 감사한다.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김 추기경이고, 그 오른쪽이 형 김동한 신부.

 

 

  

추기경 김수환(81).

연세가 들면서 그의 상징인 '긴 인중'이 유난히 길어 보이는 추기경은 두눈을 지그시 감고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우리네 할아버지다. '혜화동 할아버지'의 웃는 모습을 뵐 때면 넉넉하다 못해 천진스런 느낌까지 든다.

그러나 그 소탈한 웃음에는 버거웠던 인고(忍苦)의 세월이 녹아있다. 그는 30여년간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한국교회의 큰 어른으로 살아오고, 때로는 정도(正道)에서 이탈하는 역사의 흐름을 '민주''정의'의 제자리로 돌려놓는 시대의 양심으로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들의 곁을 유달리 좋아했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난 그는 이제 하느님께 한발짝 더 가까이 가있다. 스스로도 "나는 이제 해거름에 와있다. 하루에 비기면 석양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는 물론 사회 전반에서 필요한 말씀을 주는 그는 여전히 우리 시대의 큰어른이다. 생생한 육성으로 회고하는 그의 삶과 신앙을 연재, 격동기 한국사회와 교회 역사의 한 장을 독자들과 함께 정리한다. <편집자> 

 

나는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을 무척 좋아한다. 산등성이로 석양이 기우는 풍경은 내 고향이고 내 어머니이다.

 

 유년시절 첫 기억은 서너살 무렵, 경북 선산에 살 때이다. 어머니는 곡마단이 들어온 읍내 공터 구석에서 국화빵을 구워 파셨다. 난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어머니가 장사하는 모습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옹기를 팔러 장에 나간 어머니가 해질녘이 되어도 안 돌아오시면 큰 길로 나가서 어머니가 나타나실 고갯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늘 그 시간이면 서쪽 고갯마루에 석양이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우리 집안은 조부 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본관이 광산(光山)인 조부 보현(요한) 공은 독실한 신자로 1868년 무진박해때 충남 논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하셨다. 그 바람에 나의 아버지(김영석 요셉)는 유복자로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당시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그랬듯이 옹기장수로 전전하다 대구 처녀인 어머니(서중하 마르티나)와 결혼해 대구에 정착하게 되었다.

 

 62녀의 막내인데 가난 때문에 이사를 자주 다녀서인지 고향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나기는 했으나 서너살 때는 경북 선산에서 살았다. 추측컨대 선산에서도 셋방살이를 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 '다른 집 애들은 점심을 먹는데 난 왜 굶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가난을 뼈저리게 느꼈을 텐데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선산에서 어린 나이에 항일전쟁(?)을 치른 적이 있다. 집 가까이에 일본 아이들이 다니는 소학교가 있었는데 바로 위 형과 그 아이들간에 싸움이 붙었다. 그 싸움판에 끼어 있다가 일본 아이들이 던진 돌에 이마를 맞았다. 그때의 흉터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요즘도 가끔 사람들에게 흉터를 내보이면서 '항일 독립운동의 상처'라고 농담을 한다.

 

 5살 무렵에 구미와 가까운 군위로 이사했다. 선산에서 군위로 이사가느라 큰 고개를 넘은 기억이 선명하다. 군위에서 석양이 지는 고갯마루를 볼 때면 '저 너머에 고향이 있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태어난 곳이 대구임에는 틀림없지만 고향으로서 대구에 대한 추억은 별로 없다. 특히 유신반대운동을 할 때 고향 사람들이 나를 못마땅하게 여겨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충청도 사람이다. 아버지가 "순한아~"라며 나를 부르는 억양이 특이했던지 동네 사람들은 내가 나타나면 아버지 억양을 흉내내곤 했다. 내 이름이 '수환'이란 사실은 나중에 호적을 떼어보고서야 알았다. 동네 사람들 싸움을 잘 말리고, 바둑과 장기두는 것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해수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아버지를 위해 연도를 바치던 어머니 음성이 기억난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청국(淸國)으로 보내달라"고 기도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동네에 장사를 하는 청나라 사람이 살기는 했지만 죽은 아버지를 왜 그 사람들 나라로 보내달라고 하는건지. 나중에 알고 보니 '천국(天國)''청국'으로 잘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나와 3살 차이가 나는 형 동한과 어머니는 내 유년시절의 전부나 다름없다. 다른 형들과 누이들은 돈 벌러 일찍 객지로 나가거나 철이 나기 전에 출가를 해서 그런지 깊은 정이 들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깊게 인간적 관계를 맺은 상대를 꼽으라면 단연 동한 형이다. 형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소신학교에 갈 때까지 한번도 헤어져 본 적이 없다. 형은 참 좋은 사람이었고, 더할나위 없이 동생을 사랑해 주었다. 형제들은 싸우면서 자란다지만 난 형과 싸운 기억이 전혀 없다. 형이 소신학교에서 공부하다 방학 때 집에 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왜정 때 내가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자 내 손을 잡고 엉엉 울던 형, 나보다 앞서 신부가 된 후에는 '순진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모르겠다'는 핀잔을 들어가면서 결핵환자들을 돌보던 형, 동생이 추기경이 되자 행여나 불편을 끼칠까봐 일부러 피하셨던 형. 형 김동한 신부는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시다 일생을 다하신 분이다.

 

 유년시절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참으로 절대적이었다. 어머니는 당신 이름 석자와 하늘 천() 따지() 정도의 글자 밖에 아는 것이 없었고, 가난 때문에 거의 평생토록 옹기와 포목을 머리에 이고 팔러 다니셨다. 그러나 곧은 신앙심과 여장부같은 기질만은 대단하셨다. 그런 어머니 무릎에서 신앙심을 키우고 인간으로서 기본교육을 배운 것을 하느님께 감사한다.

 

 성품이 곧으셨던 어머니는 자식 교육에도 매우 엄격하셨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밖에 나가 '아비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더 엄격하게 자식들을 키우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편애(偏愛)이다 싶을 정도로 이 막내 아들에게 사랑을 쏟으셨다. 막내 아들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애쓰시는 것이 싫어서 어느해 여름에는 "과일 먹으면 자꾸 배탈이 난다"고 거짓말을 하고 과일을 입에 대지 않았다.

 

 동한 형이 소신학교에 간 후로 어머니와 단 둘이서 살았다. 밤이 되면 어머니는 보통 1~2시간씩 기도를 바쳤는데 난 옆에서 뜻도 모른 채 꾸벅꾸벅 졸면서 중얼중얼댔다. 그때 기도하다가 엄마 등 뒤에서 잠드는 게 내 특기였다. 기도하기 싫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성서나 옛 성인의 이야기, 또는 우리나라 고담 중 효자전을 들려주시곤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속으로 '나도 성인되고, 효자돼야지'하고 다짐하곤 했다.

 

 한번은 찰고(擦考)를 앞두고 교리문답을 외워놓지 않아 어머니에게 혼쭐이 난 적이 있다. 그때 효자전 이야기가 생각나 버드나무 회초리를 만들어 어머니에게 갖다드리고는 "이 불효자를 때려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매를 드시는 대신 다시 한번 조용히 타이르는 것으로 잘못을 용서해주셨다.

 

어머니의 젖무덤을 만지며 응석을 부린 기억은 없다. 그래도 어머니는 내 엉덩이를 두드리면서 "어이구 내 강아지, 내 강아지"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우리는 늘 초가삼간에서 살고, 한때는 셋방살이도 했지만 어머니는 그 옹색한 집에서도 공소를 열었다. 봄 가을 두차례 방문하시는 신부님을 모시는 관계로 우리 집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도배를 하고 살았다. 그것도 봄 가을 두번씩이나 말이다.

 

그때 신부님 방문은 임금님 행차나 다름없었다. 신부님이 오시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찬미 예수님"하고 인사를 했다. 식사 때면 평소 구경도 못해보던 반찬이 신부님 밥상에 올라왔는데 나중에 그것을 얻어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형과 내가 군위보통학교에 다닐 때였다. 대구 친정에 다녀오신 어머니는 두 자식을 불러 앉히고는 천청벽력같은 말씀을 하셨다. "너희는 이 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

 

 훗날 짐작컨대, 어머니는 대구 시내에서 장엄한 사제서품식 광경을 보신 후 감동을 받으셨던 것 같다. 형은 이듬해 흔쾌히 대구에 있는 신학교 예비과(초등 5, 6학년)로 옮겼다. 나도 2년 후 형을 따라 신학교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단지 어머니 명에 따른 것이지 신부가 될 생각은 없었다.

 

 어릴 적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 상점에 취직해서 5~6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한 후 25살이 되면 장가를 갈 생각이었다. 어머니한테는 한번도 말씀드린 적이 없지만 내 나름대로 골똘히(?) 생각해서 구체적으로 세워놓은 계획이었다.

 

 그 계획에 미련이 남아 있었던지 신부가 된 후에도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집을 보면 부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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