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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일본 상지대학 유학시절(上)

by 세포네 2009.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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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대한 반감에 유학길이 '고생길'

 

일본 상지대학 유학 시절의 김수환(뒷줄 가운데). 앞줄 왼쪽 안경 쓴 이가 김정진, 그 옆이 최석우, 뒷줄 김 추기경 왼쪽이 최익철 신학생이다. 맨 오른쪽은 한공렬(제2대 전주교구장) 신부. 2. 김 추기경의 '영적 스승'이자 서강대 설립자인 게페르트 신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내 연배 신부들 중에 세상을 떠난 이들이 많은데 유독 일본 유학동기 4명만은 지금도 건재하다.

 김정진(은퇴)·최석우(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최익철(은퇴) 신부가 나와 함께 1941년 일본 상지대학으로 함께 유학을 떠난 신부들이다. 최석우 신부는 지금도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교회사 연구에 전념하고 있고, 최익철 신부는 평생 모은 우표로 하느님 사업에 여력(餘力)을 보태고 있다.

 

 나 역시 밀려드는 강연요청 탓에 바쁘게 살고 있으니 우리에겐 뭔가 특별한 건강비결이 있는 것 같다. 사실은 그때 한 명(신종호)이 더 있었는데 아쉽게도 사제생활 도중에 환속했다.

 당시만 해도 유학 신학생들은 대부분 로마에 가서 공부를 했다. 그런데 주교님들은 일본 식민통치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우리를 일본으로 보내셨다. 아무래도 일본을 잘 아는 신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듯했다.

 

 유학을 떠난다면 마음이 설레야 정상일 텐데 일본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내게는 유학길 자체가 고행길이었다. 일본 형사들이 부산행 기차 안에서 학생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훑어보고, 부산항에서 연락선에 오를 때 몇번씩 신원조회를 하는 것도 못마땅했다. 배 안에는 막노동 일거리를 찾아 보따리 하나 옆에 끼고 고향을 떠나는 한국인들이 많았다. 다들 옷차림은 남루하고 얼굴은 초췌했다.

 

 그런데 일본 선원들이 통제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발길질을 하면서 욕을 퍼붓는 것을 목격하고는 속이 얼마나 부글부글 끓어올랐는지 모른다.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라서 한층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혼자서 끌탕만 했을 뿐이지 그 자리에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본에 내려 학교에 찾아갈 때까지 불심검문이 대여섯번도 더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 경찰들은 검문할 때면 매번 나를 건너뛰었다. 나를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일본 사람들과 한참동안 얘기를 하다가도 고향 얘기가 나와 "나는 조선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면 한결같이 표정부터 바뀌었다.

 내 얼굴이 일본인처럼 생겼나? 난 일본인 취급을 받는 게 무척 싫었다. 일본인들과 구별되게 얼굴에 무슨 표시를 하고 다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궁리를 했을 정도다.

 

 도쿄에 있는 상지대학(Sophia University)은 예수회가 1913년에 설립한 대학이다. 철학을 전공하기 전에 2년 동안 예과에서 주로 독일어를 공부했다. 신학생 신분이라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거나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 기회는 없었다. 공부하는 시간 외에는 그저 동포 친구들과 어울려 우국지사마냥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고, 서점에 들러 전공서적을 고르는 게 고작이었다.

 

 어느날 교정에서 일본인 교수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은 나를 믿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제의하곤 했는데 그날 문득 이런 말을 꺼냈다.

 

 "내가 겪어보니까 한국 학생들은 좀 교활한 면이 있어."

 "교활하다니요? 교수님, 지금 한국은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질 나쁜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이간질시키면서 조종하고 있잖습니까."

 "조종이라니?"

 "일본 식민정책을 아시잖아요. 한국인은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성과 이름까지 바꾸고 있어요. 일본인 교사가 한국말을 하면서 뛰어노는 소학교 어린애를 불러다 매질을 했다는 얘기도 들리더군요. 인간인 이상 약자가 강자 앞에서 비굴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저 같은 젊은이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꼭 민족을 위해서만 일을 해야 하나?"

 "그럼, 배운 우리가 고통받는 민족, 무지몽매한 민족을 내팽겨쳐두고 무슨 일을 해야 옳은 건가요."

 난 목이 메어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마 그 대화를 고등계 형사가 엿들었다면 그 즉시 철창 신세를 져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화를 엿들은 사람이 있기는 있었다.

 며칠 후 독일 출신의 게페르트(Theodore Geppert) 신부님이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지나가다 우연히 자네 얘기를 엿들었네. 자네 가슴 속에 뜨거운 불덩이가 있더구만. 잘못하면 화상을 입겠어. 그런 마음으로는 신부가 될 수 없다네."
 "신부님, 민족이 저를 부르거나, 제가 민족을 위해 헌신할 기회가 온다면 주저없이 달려갈 겁니다."

 "아니야, 아니야. 내 눈에 자네는 꼭 신부가 돼야 할 사람이네."

 

 게페르트 신부님. 그 분은 잊지 못할 나의 '영적 스승'이다. 과묵하고 중후한 인상이었지만 대화를 하다 보면 모성애에 가까운 자애심이 느껴지곤 했다. 언젠가는 내 얼굴이 고독해 보였던지 따로 부르셔서 "신부가 되면 더 고독하다. 그 고독을 이겨내는 좋은 방법은 너만의 도서관을 꾸미는 것이다" 하시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어보라고 권해주셨다.

 

 게페르트 신부님은 당신도 기회가 되면 한국에 건너가 일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식민통치 시절이라 선교사들조차도 관심이 덜했던 한국을 극진히 생각해주는 마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6.25 전쟁 직후 한국에 들어와 1960년 서강대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맡으신 것이다. 신부님은 지난해 여름 일본에서 98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신부님은 정말 나에 대한 사랑이 깊으셨다.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소리내어 울기까지 한 일이 있다. 사제가 되겠다고 현해탄을 건너온 식민지 국가의 제자가 주검으로 변해 돌아올지 모를 전장(戰場)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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