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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고달픈 귀국길

by 세포네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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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사리 밟은 고국 땅 '실망 투성이'

 

며칠 동안 굶은 채로 부산항에 내려 형님 김동한 신부(오른쪽)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51년 형님 신부가 해군 군종신부로 입대하기 직전에 찍은 사진이다.

 해방된 내 조국으로 돌아오는 길이 왜 그리 멀고 고달펐던가.

 괌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것은 1946년 9월이었다. 원래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싶었으나 대구 교구장님의 승낙서가 좀체 도착하지 않는 데다 이래저래 일이 꼬여서 3개월 더 일본에 머물다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재일교포들의 분열과 다툼이었다. 36년간 남의 나라 밑에서 설움을 겪다 해방됐으면 이제 한마음이 되어 조국의 미래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재일교포들은 툭하면 좌우로 갈라져 싸웠다. 그때 일본 주둔 연합군은 한국인과 같은 제3국인을 일본인보다 우대했다. 가령, 일본인은 맥주를 구입할 수 없어도 한국인은 자유롭게 맥주를 사서 마실 수 있었다. 그런데 교포들은 맥주를 마셔가면서 회의를 하다 의견이 서로 안맞으면 맥주병을 깨서 혈투극을 벌이곤 했다. 그런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실망스럽고 마음이 아팠다.

 귀국하는 한국인을 위해 편성된 동경발 임시열차에 몸을 실었다. 일본 열도의 제일 서쪽에 있는 구주(九州)지방 하까다에 가서 귀국선을 타야 했다. 평소 19시간이면 닿는 거리인데 그 임시열차는 서른 대여섯시간이나 걸렸다.

   그 길고 지루한 시간을 도시락 한개로 버텼다. 하까다에 내리자 안내원들이 우리를 큰 창고에 밀어넣었다. 가마니가 깔린 바닥에서 모포 한장과 건빵으로 사흘을 견뎠다.

 사흘 후 마침내 귀국선에 올랐다. 다음날 아침 나절에 부산항이 보였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감격스러워했다. 단 1초라도 빨리 일본인들이 물러간 조국 땅을 밟아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배가 항구에 정박하기도 전에 미군제복처럼 생긴 옷을 입은 청년들이 배에 올라왔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청년들은 우리를 모아놓고 장황하게 일장훈시를 했다. 귀에 들리지도 않았지만 희망찬 조국건설을 위해서 ○○를 해달라는 얘기 같았다. 화가 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타지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들어오는 사람들 앞에서 무슨 입바른 소리인가. 여기 있는 사람들 얼굴을 보면 모르나. 며칠 동안 먹은 거라곤 건빵뿐이 없어 쓰러질 판인데.'

 내 옆에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 여인이 있었다. 한국에 있는 남편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남편이 어디에 사는지 알아요?"
 "전에 남편하고 한 번 가본 일이 있어요. 그런데 그 집에 가니까 본처가 있더라고요. 남편이 본처랑 이혼하고 부를 테니 먼저 일본에 가 있으라고 해서 기다렸는데 소식이 없어서요."
 "그럼 이혼했다는 연락은 받았어요."
 "아뇨. 이혼했으리라 믿고 가는 길이에요."

 국적을 떠나서 한 여자를 내팽개친 한국 남자의 무책임한 행동에 또 실망했다.

 동포들은 하선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하루 종일 쫄쫄 굶으면서 대기했다. 사무치게 그리웠던 조국 땅을 지척에 두고 바다에 떠서 굶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하선 허락이 떨어져 배에서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깡패들이 몰려와서 승객들의 짐, 특히 부녀자들의 핸드백을 낚아채 가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배에 가둬놓고 있다가 어두워진 후에 하선시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본에서 온갖 설움을 겪은 동포들이 조국 땅을 밟자마자 당한 것이 약탈이라니…. 또 한번 실망했다.

 저녁밥이라고 나온 게 밀가루 몇 조각 띄운 멀건 국물이었다. 그것도 한사람씩 퍼준 게 아니라 한번 마시고 옆사람에게 그릇을 넘겨줘야 하는 엉터리 배식이었다. 개인화물 하역작업은 새벽 2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그래서 떠밀려들어간 곳이 큰 창고였는데 구석에 시체 3구가 있었다. 귀국 동포들의 감정이 결국 폭발했다.

 동포들은 "우리가 너희한테 밥을 달라고 했냐, 돈을 달라고 했냐. 왜 붙잡아놓고 이 고생을 시키냐"면서 "차라리 일본으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렇다. 해방 직후의 조국은 법과 원칙도 없이 혼란스러웠다.

 아무튼 저녁 늦게 그 실망스러운 자리에서 빠져 나왔다. 그 시간에 어딜 찾아가서 밥 한술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는 곳은 범일성당과 성당 근처 김태관 신부님 집이었다. 이미 고인이 되신 김 신부님(예수회)은 일본 상지대학 선배로서 방학 때 잠시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 집에 도착했더니 저녁식사를 하던 가족이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내 얘기를 듣고는 밥을 먹고 가라고 옷소매를 끌었지만 괜히 예고없이 찾아와서 가족들 밥을 축내는 것 같아 성당 위치를 물었다. 범일성당에 형님(김동한 신부) 서품동기인 신 신부님이 보좌신부로 계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가족들은 "보좌신부의 성은 신씨가 아니라 김씨"라면서 "그렇지 않아도 아까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그 김 신부님이 오신줄 알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었다. 참 이상했다.

 '형님 동기신부들이야 내가 뻔히 다 아는데. 그럼 혹시 형님이….'

 성당을 찾아 올라가는데 얼마나 마음이 앞서던지 헛걸음질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제관 문을 두드렸더니 교리공부를 하고 있던 한 아주머니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아이들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와~ 김 신부님 동생이다"라고 소리쳤다. 형님 책상에 놓여있는 내 액자사진을 아이들이 본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조금 떨어진 식당쪽을 향해 "신부님, 신부님, 동생 오셨어요!"라고 외쳤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형님이 맨발로 달려나왔다. 그 반가운 마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는가.

 학병에 나가는 나를 부산항에서 배웅할 때 눈물을 보이신 형님이었다. 며칠 동안 굶은 채로 부산항에 내리자마자 그 형님을 만나 밥을 얻어먹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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