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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갈등과 유혹

by 세포네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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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한 여인에게서 '청혼'받고 고민
 
대구시 중구 남산동 대구교구청내 성모당에는 예나 지금이나 기도하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이 성모당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막내아들의 무사귀환을 빌었다.

 

 나 같은 사람은 누구와 언성을 높여 싸워본 일이 한번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전쟁터에서 돌아와 어머님을 찾아뵙기 위해 도착한 대구에서 경찰관과 대판 언쟁을 벌인 적이 있다.

 부산항에서부터 조국의 혼란스런 현실에 실망해 마음이 언짢았던 것이 사실이다. 형님 자전거를 타고 부산항으로 짐을 찾으러 갈 때도 경찰관의 고압적 검문 태도에 마음이 상했다. 대구행 열차는 유리창이 모두 떨어져 나간 데다 시트도 성한 것이 없었다. 해방 후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사람들이 떼어간 것이다.

   전등도 없는 열차가 컴컴한 터널에 들어가면 선반 위에 올려둔 짐이 없어지는 일이 다반사라 나 역시 터널에서는 가방을 꼭 껴안고 있어야 했다. 
   '이 나라가 제 꼴을 갖추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내내 마음이 답답하고 서글펐다.
 경찰관과 언쟁이 붙은 이유는 통행금지 위반 때문이었다. 밤 늦게 역에 도착하는 승객에게는 손에 도장을 찍어주는 모양이었는데 일본에서 돌아온 내가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사시는 남산동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데 경찰관이 나를 불러 세웠다.

 "여보 여보, 어딜 가요?"
 "어딜 가다니요. 집에 가는데요."
 "이 사람이, 통행금지 있는 거 몰라?"
 "… 통행금지요? 처음 듣는데요."
 "(거칠게) 모르다니? 어디서 왔어?"
 "며칠 전에 일본에서 왔습니다. 일본서 공부하다 귀국하는 길입니다."
 "공부만 하면 제일이야."
 "몇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으면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럼 경찰관이 친절하게 가르쳐 줘야지, 다짜고짜 죄인 다루듯 다그치는 게 잘하는 겁니까."

 나는 물러서지 않고 언성을 높여 꼬박꼬박 말을 되받아쳤다. 일제 압제에서 풀려났으면 국민들이 서로 감싸주면서 한마음이 되어야 할 텐데 경찰관의 태도에서 보듯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난 그 경찰관이 미운 게 아니라 조국의 현실이 서글펐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도착했다. 그동안 내가 어머니 품에 안겼지만 그때는 내가 어머니를 가슴에 안았다. 어머니가 그렇게 우시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다음날부터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네는 어머니 덕에 살아왔네"라는 인사말을 했다. 그렇다. 난 어머니 기도 덕에 목숨을 건졌다. 어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구교구청 옆 성모당에 나가 이 아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바다 한가운데서 미군 잠수함 공격에 목숨을 잃을 뻔한 그 순간에도 어머니는 성모님께 아들의 무사귀환을 빌고 계셨다.

   어머니의 그런 사랑을 느낄 때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얼마나 더 크겠는가'하고 생각하곤 했다.
 신학교에 복학하기 전까지 대구에서 9개월쯤 머물렀다. 대구대목구 임시 교구장인 주재용 신부님의 일을 거들고, 형님이 계신 부산을 오가면서 보낸 그 기간에 갈등과 유혹이 끊이지 않았다.
 
    누님은 집안 형편이 쪼들리자 "네 형이 신부됐는데 너까지 또 신부가 돼야겠느냐"면서 신학교 복학을 탐탁스러워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보다 마음을 더 심란하게 만든 사건은 한 여인의 청혼이었다.
 그 여인은 형님이 계시는 범일성당에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형님이 관여하는 고아원에서 일하면서 가끔 사제관 청소를 해주었는데 잘은 몰라도 심적 고통이 큰 사람처럼 보였다. 마음의 병 때문인지 그녀가 병으로 눕자 형님은 "다른 사람은 그 여자를 좀 어려워 하니 네가 병간호를 해주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병간호를 하는데 그녀가 어떤 얘기를 하다말고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장황하게 들려주었다. 
    그때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고해성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당 신부님은 그녀가 어려워할 것 같아 영도에 계시는 프랑스 신부님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모셔왔다. 그녀의 고해성사는 한시간도 넘게 걸렸다. 그런 관심과 배려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 잡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마음이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 자신에게 잘해주는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그쪽으로 마음이 쏠리는 것은 당연할 것도 같다.

 어느 날 그녀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를 받아줄 수 있겠어요?"
 깜짝 놀랐다.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소신학교 시절에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갈 때면 교장 신부님이 "여자는 아예 쳐다보지도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셔서 안면이 있는 여자에게도 고개를 돌렸는데 프로포즈까지 받게 될 줄이야….

 물론 어릴 때부터 '나만을 사랑해주는 여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여인이 나타나자 나에게 모든 걸 거는 한 사람을 평생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신부가 돼서 부족하나마 여러 사람에게 고루 사랑을 쏟는 일이 훨씬 쉬울 것 같았다.

    내가 단호하게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단념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훗날 전해 들었을 때는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 해프닝이 나는 사제의 길을 가야 할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하는 나를 붙잡아 준 은인은 장병화 주교님(1990년 선종)이다.
 당시 우리 본당에 계시던 장 신부님께 내 결점만 쏙쏙 골라서 과장되게 말씀드린 적이 있다. 신부가 되어도 집안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고, 여자에게도 마음을 쉽게 빼앗길 것 같다는 식으로 말이다. 사제가 되면 안 될 사람이라고 판단하시도록 유도한 것이다.

 장 신부님은 한달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시더니 한달 내내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정확히 한달째 되는 날 아침미사에 참례한 나를 부르셨다.
 "신부는 모름지기 자신의 약점이 뭔지 알아야 해. 그래야 그걸 이겨내고 성덕을 쌓을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자네는 꼭 신부가 돼야 하네."
 장 신부님은 내가 한 말을 모두 거꾸로 해석하시고 신학교 복학을 독려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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