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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전쟁터에서(하)

by 세포네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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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했던 탈출계획 끝내 '물거품'
 
남의 나라 전쟁터에 끌려온 학병이었기에 종전 소식은 더할나위 없이 감격스러웠다. 사진은 1945년 9월2일 시게미쯔 일본외상이 미국 미조리 항공모함에서 항복조인서에 서명하는 장면.

탈출의 날이 밝았다. 아침에 미군 B-29 폭격기가 포탄을 쏟아붓고 돌아가면 곧바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작정이었다. 우리 일행은 몸을 숨기고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각에 나타나는 폭격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날 따라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 폭격기가 보이질 않았다. 폭격기가 돌아간 후에 출발해야지 만일 바다 한가운데서 폭격기를 만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기다리면 기다릴 수록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냥 부대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태평양 한가운데서 죽을 각오를 하고 출발하느냐의 선택만 남았다. 우린 출발하기로 결정하고 배를 띄웠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미군 폭격기가 그제서야 나타났다. 파도가 심해 한 사람은 멀미를 하느라 정신을 못차렸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배를 돌려 부랴부랴 섬으로 되돌아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도주계획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우리의 목적지 유황도는 200마일(약 320㎞)이나 떨어져 있었다. 카누처럼 생긴 배를 타고 도주하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다.

그리고 그날 부대에 조금만 더 늦게 복귀했더라면 총살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일본(군)을 비난하는 편지를 내 사물함에 꽂아두고 출발했으니 말이다.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라서 겁없이 도주를 감행했지 나이가 조금 더 들었더라면 그런 무모한 계획을 행동에 옮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럭저럭 부대생활을 했다. 남의 나라 전쟁터에 끌려나온 학병 신분이었기에 별다른 의미를 둘 수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연합군에 무릎을 꿇었다. 일본의 항복은 우리 민족의 해방이었다.

'아, 고국에선 36년 압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백성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외치고 있겠지….' 일본 군복을 입고 있는 조선 학병의 기쁨과 감격은 더 컸다.

미군은 몇달 동안 우리를 완전히 무장해제시킨 후 섬에 상륙했다. 일본군측에서는 부대원들이 미군과 접촉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시켰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미군은 일본 군인들을 본토로 송환하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억울하게 끌려온 한국인들을 먼저 풀어줘야 하는데 미군은 무슨 영문인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여기에 강제로 끌려온 한국인들이 있으니 빨리 돌려보내달라"는 내용의 영문편지를 쓰고 맨 밑에 '스티븐 김'이라고 싸인을 했다. 내 세례명을 영어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편지는 내가 갖고 있던 콘사이스 영어사전과 동료의 중학교 1학년용 영어교과서, 그리고 우연히 손에 쥔 'LIFE'라는 영문 화보잡지를 총동원해서 쓴 것이다. 문제는 미군과의 접촉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어떻게 편지를 전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어느날 미군 주둔지역 정지(整地)작업에 불려나가 일하던 중 트랙터를 몰고 있는 미군 병사에게 살짝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난생 처음 영어로 말을 하는 데다 절박하게 부탁하는 입장이라 내딴에는 깍듯이 예의를 갖췄다.

"Would you pease be kind enough to speak with me?"
"What?"
"… …"
"What?"

미군 병사가 그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접촉을 포기하고 땅에 주저앉아 묘안을 짜냈지만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후 그 병사가 다가오더니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느냐"는 식으로 말을 걸어왔다. 너무나 반가웠다.

난 땅바닥에 한반도와 일본 지도를 그려가면서 "여기는 일본, 저기는 한국. 난 한국 사람이다. '히로이드'(미국식 일본 천황 이름)를 증오(hate)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너희 사령관에게 전해달라"면서 병사 손에 몰래 쥐어 주었다. 며칠 후 미군측에서 요란스럽게 편지의 주인공을 찾아다녔다. 한국인이 열댓명 있었으니까 나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미군 사령관은 나를 불러놓고는 "내가 사령관이다. 질서문란 행위는 용납하지 않는다"면서 엄포만 놓았다.

실망하고 나오는데 사령관 부관인 중위가 나를 따로 불렀다. 의사소통이 안돼 몸짓과 필담(筆談)으로 1시간 가까이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왜 나를 따로 불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중위는 "그동안 이 섬에 미군 조종사 열댓명이 공격을 받고 추락했다. 그들의 행방을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미군이 한국인을  풀어주지 않는 이유를 그제서야 알았다. 일본군들이 모두 모른다고 발뺌을 하자 한국인들에게 정보를 캐낼 요량으로 붙잡아 둔 것이었다.

그 얘기라면 나도 아는 것이 있었다. 체포된 미군 조종사들이 묶여있는 것은 두눈으로 직접 본 데다 그 이후 일본 군인들이 미군 인육(人肉)을 먹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건너편에 일본군이 있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알아도 말할 수 없다"며 한국인에 대한 신변 안전보장을 요구했다. 그가 내 요구를 받아들여 그 섬의 한국인들은 모두 미군지역(American Zone)으로 들어왔다. 육군에는 학병들이 전부였으나 해군쪽에서는 100명이 넘는 한국인 노무자들이 넘어왔다.

그때 일본 해군 사령관이 노무자들에게 무슨 거짓말을 했던지 그들은 "학병 몇명 때문에 이제 미군 종살이를 하게 됐다"며 우리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난 "미군의 손을 거쳐야 우리가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그들을 설득했다.

다행히 노무자들 중에서 목격자 3명이 나타났다. 그 무렵 괌(Guam)에서는 전범(戰犯)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미군측의 동행 요청을 받고 재판증인으로 나설 노무자 3명과 함께 괌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6개월 정도 머물다 일본을 거쳐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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