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교회와 영성]/한국순교자245

<25> 진주 진영, 진주 옥터 정찬문·윤봉문 복자 순교 터로 전해져, 두 순교자 시복 위한 현지 신자들의 현양 열기 식을 줄 몰라 ▲ 진주 진영과 진주 옥터 자리. 울산에 경상 좌병영이 있었다면, 진주에는 경상 우병영이 자리했다. 임진왜란이 계기였다. 1592년 10월과 1593년 6월에 벌어진 진주성 1, 2차 전투로 호남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진주의 위상이 부각되면서 1602년 경상우도 병마절제사영, 곧 경상 우병영이 창원 합포(마산)에서 진주성 안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에 앞서 경상 우병영이 진주로 옮겨지기 이전부터 설치돼 있던 진주목은 성 밖에 그대로 뒀다. 한동안은 두 직책을 경상 우병사가 겸직했지만, 나중엔 따로따로 임명됐다. 이 때문에 경상 좌병사가 울산 도호부사를 겸직하던 경상 좌병영, 곧 울산 병영은 순교지가 .. 2015. 1. 25.
<24> 상주 옥터 안동교구 첫 복자 박상근과 동료 순교자 모진 옥살이에도 끝까지 신앙 증거한 곳 조선 시대 감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실제 모습은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본 모습보다 훨씬 처절했다고 한다. 죄인들은 문초와 형벌을 받고도 온갖 노역에 동원돼 이중으로 옥살이의 고통을 느껴야 했다. 또 죄인은 물 한 모금도 자유롭게 마실 수 없었고, 식사는 하루에 한 번 조밥 한 덩어리가 고작이었다. 배고픔을 못 이긴 이들은 바닥에 깔린 볏짚을 뜯어 먹거나 기어 다니는 이를 잡아먹었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박해 시기도 많은 신앙 선조들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고된 옥살이를 겪었다. 옥에 갇힌 교우들이 너무 많아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였고, 상처에서 흐른 피와 고름으로 악취가 나고 염.. 2015. 1. 25.
<23> 전주교구 고창, 김제 순교지 전주옥에 함께 갇힌 최여겸·한정흠 복자, 각자의 고향 장터로 보내져 참수형 전라도 무장현 ‘개갑장’이 역사에 등장하는 건 1894년이다.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 등 동학 접주들과 교도 4000여 명이 그해 3월 개갑장터에 모였다가 인근 구수내(현 구암리) 마을에서 봉기하면서다. 우시장으로는 전국적 지명도를 갖고 있었지만 평범한 시골 장터였던 개갑장이 역사에 남는 현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에 100년 가까이 앞선 1801년에 이미 개갑장터는 서학, 곧 천주교와 뗄 수 없는 인연을 맺는다. 최여겸(마티아, 1763∼1801) 복자가 무장현을 주 무대로 선교하다가 1801년 8월 27일 개갑장터에서 순교해서다. 이러고 보면 100년 세월을 건너뛰어 서학과 동학이 적잖은 인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 2014. 12. 14.
<22> 전주교구 고창, 김제 순교지 |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는 동정부부 순교자 유중철(요한)과 이순이(루갈다)를 ‘한국 순교자들의 보석’이라고 칭했다.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장남과 며느리이기도 했던 이 부부는 전주옥과 숲정이에서 각각 순교했다. 두 곳은 전주교구 복자 24위 중 18위가 순교한 곳이다. 이 순교터들은 순교자들의 피가 마르지 않은 곳이자, 천주를 향한 기도가 끊이지 않던 자리다. 이러한 주님 용사들의 숨결을 느끼고자 전주옥 터와 숲정이 성지 그리고 그들이 묻힌 치명자산을 찾았다. 의연히 칼을 받다 전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전주천 동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1.4km 떨어진 곳에 숲정이 성지가 있다. 나무가 많아 ‘숲머리’라고도 불렸던 이곳은 조선 시대 군사 훈련장인 장대가 있던 곳이자 중죄인들을 벌하던 처형장이었다. 복자.. 2014. 12. 14.
<21> 유항검 생가터, 초남이성지 전주라 하면 많은 사람이 한옥마을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전주 한옥마을에는 경기전과 향교, 동헌, 오목대 등 역사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이렇듯 전주는 예로부터 유교 문화가 뿌리 깊게 박힌 선비의 고장이었다. 그만큼 천주교 핍박은 심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전주교구 순교자 중 정문호와 조화서ㆍ손선지ㆍ이명서ㆍ한재권ㆍ정원지ㆍ조윤호 등 7위는 1984년 성인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올해 8월,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 1759~1791) 등 전주에서 치명한 23위가 복자가 됐다. 그들의 순교지 중 한국천주교회의 첫 순교자들이 치명한 풍남문 밖을 찾았다. “전주 한옥마을을 찾아오는 사람은 엄청나게 많죠. 그런데 찾아오는 사람 대부분은 먹을거리에만 관심이 있어요... 2014. 11. 30.
<20>울산 병영순교성지 및... 경주 진목정성지·대구 복자성당 무진박해로 순교한 이양등·김종륜·허인백 복자 기려, 피신처·가매장터 등에서 신앙의 숨결 느낄 수 있어 ▲ ◀◀이양등, 김종륜, 허인백 등 세 순교자가 시복되자 복자본당에선 이들을 주제로 한 유리화를 제작 봉헌했다. 역설적이게도 ‘박해’는 천주교가 퍼져나가는 데 ‘민들레 씨앗’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한양(서울)과 근기(경기), 내포(충청) 등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영ㆍ호남 일대로 피신하면서 복음이 퍼졌고, 경상좌도 일대, 곧 낙동강 동쪽 남부 지역에서도 교우촌을 중심으로 복음이 뿌리를 내렸다. 언양 간월과 울산 죽령 등 현재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일대 교우촌이 대표적이다. 100년에 가까운 박해는 병인박해기에 이르면서 절정을 보인다. 1866년 봄의 박해 병인양요 직후인 1866년 가을부터 이듬해.. 2014. 11. 9.
<19> 대구 관덕정 순교기념관 경상감영 옥터, 오류정 을해박해·정해박해로 관덕정·경상감영 옥터 등에서 복자 20위 순교 ▲ 관덕정순교기념관 1814년 조선 전역에 큰 흉년이 들었다. 문전옥답이 즐비한 마을조차도 기아를 피해가지 못했다. 게다가 수해까지 겹쳐 굶어 죽는 이들이 넘쳐났다. 청송 노래산 교우촌(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새노래길)도 흉년에 시달리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당시 이 교우촌에 드나들며 고기를 팔거나 구걸을 하던 전지수는 흉년으로 신자들의 애긍이 줄어들자 구걸에 만족하지 못하고 교우촌을 약탈할 심보로 신자들을 밀고하려는 생각을 품기에 이른다. 일설에는 그가 배교자라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그는 1815년 청송현 관장에게 천주교 신자들이 노래산에 산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는 그해 예수 부활 대축일에 노래산 교우촌에 모여든 신자들을 한꺼번에 체.. 2014. 11. 9.
<18> 청주 충청 병영순교지 읍성 순례길 걸으며 느끼는 순교자 숨결 ▲ 읍성 순례지 조선은 성곽의 나라였다. 20세기 초까지 현존했던 조선 성곽은 무려 2000여 개에 이른다. 그렇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성곽은 대부분 훼손됐다. 청주 읍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심 한복판 청주 감영과 병영을 둘러싸고 있던 옛 청주 읍성은 1910년대 일제가 도시정비사업을 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인 상가를 만들며 허물어버렸다. 지난해 청주 읍성 훼손 100주년을 맞아 시민들이 성돌찾기운동을 벌여 찾아낸 650개와 새 석재로 청주 읍성 서문 성벽 일부를 복원했지만, 복원된 성벽은 전체 둘레 1640m 중 35m에 불과하다. 무너진 청주 읍성 안팎에 박해 시대 순교터와 신앙 증거터가 즐비하다. 이들 순교터와 증거터 관할 본당인 청주 서운동성당을 출발해 청.. 2014. 11. 9.
<17> 부산 수영장대 순교성지 차디찬 장대돌에 손 얹으면 뜨거운 순교신심 밀려오는 곳 ▲ 입구에 서면 수영장대 순교성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부산시 수영구는 조선 시대 바다를 지키던 수군과 연관이 깊은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에 해군 기지를 설치했는데 그 중 경상좌수영이 현재 수영구에 자리에 있었다. 수영구 주변에는 지금도 수영성, 수영강, 좌수영교 등 수군이 주둔하던 곳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지명이 많다. 수영구 광안동 일대에도 ‘장대골’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장대가 있던 동네라는 뜻이다. 장대는 보통 돌로 높이 쌓아 올린 건물로 장수들이 군사 훈련을 지휘하기 위해 쓰던 건물이었지만 이따금 중죄인의 사형을 집행하는 처형 터로도 사용됐다. 수영 장대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특히 .. 2014. 10. 19.
<16> 충남 청양군 정산 “여보, 당분간 몸을 피하는 것이 낫지 않겠어요?” 근처에 사는 김씨가 관아에 천주쟁이들을 고발하겠노라 으름장을 놓고 간 뒤로 아내는 심히 불안해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또 내가 피한다면 나로 인해 입교한 이들 또한 딴생각을 품을 것이 분명했다. 며칠 후 아내는 내 뜻에 따라 다른 곳으로 몸을 숨겼고, 머지않아 집으로 포졸들이 들이닥쳐 나를 관아로 끌고 갔다. 그들은 어떻게든 내 입을 통해 다른 교우 이름 알려고 했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관원들은 약이 단단히 올랐다. 결국 그들은 쇄장이를 불러 나의 목에 칼을 씌우고 발목에 쇠고랑을 채웠다. 또 두들겨 패고 희롱하며 천주교를 임금의 명을 거스른 사악한 종교라 모욕했다. “천주가 계신 후 만물이 있고 만물.. 2014. 10. 19.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 (19) 홍교만 홍교만이 주문모 신부가 도피하면서 준 성물들을 집에 보관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 기록에 따르면, 홍교만은 사돈인 정약종에게서 성물 등을 맡아 보관했다. 따라서 주 신부의 성물을 보관했다는 이 그림 내용은 작가의 착오로 추정된다.-편집자) 홍교만(1738~1801,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은 한양 출신으로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는 고종사촌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집을 왕래하다가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됐으며,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은 후 열심히 교리를 연구하고 신자들을 가르쳤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사돈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책 상자를 자신의 집에 숨겨두기도 한 홍교만은 결국 발각돼 체포됐다. 그는 1801년 4월 8일(음.. 2014. 10. 14.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 (18) 정약종 뛰어난 교리 지식을 바탕으로 알기 쉬운 한글 교리서 「주교 요지」를 쓴 정약종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 회장으로서 초기 한국교회에 큰 기여를 했다. 그림/탁희성 화백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은 경기도 광주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39년에 순교한 성 유조이(체칠리아)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1801년에 순교한 정철상(가롤로)과 1839년에 순교한 성 정하상(바오로), 성 정정혜(엘리사벳)는 그의 아들과 딸이다.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2년 후인 1786년에 형에게서 교리를 배우면서 천주교 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됐으며, 세례 후에는 교리를 연구하고 가족을 가르치는 데 전심했다. 오랜 동안의 교리 연구를 바탕으로 누구나.. 2014. 10. 14.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