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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한국순교자245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 (5) 윤유일 바오로 주문모 신부 조선 입국 도와 ▲ 의주로 신부 영입(제15도) : 윤유일(바오로, 1760-1795)이 동료 지황(사바)과 함께 조선복장을 한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의주 관문을 몰래 빠져 나오고 있다. 그림 / 탁희성 화백 윤유일은 1760년 경기도 여주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야고보)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아가타)와 윤운혜(루치아)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던 윤유일은 서적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접한 후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가족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쳤다. 1789년 교회 지도층 신자들이 북경의 구베아.. 2014. 10. 14.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4) 원시장 베드로 끝내 배교 않자 물 부어 얼어죽게 해 원시장은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출신으로, 1788~1789년쯤 사촌 형 원시보(야고보)와 함께 입교했다. 그는 어느 날 집을 떠나 1년 이상 다른 곳에서 교리를 공부하면서 천주교 신앙이 보화임을 깨닫고는 집으로 돌아와 친지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아직 세례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원시장은 호랑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성격이 사나웠으나 신앙을 실천해 나가면서 온화한 성격으로 변했다. 그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눠 주거나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 데 열중해, 그의 이름은 관장 귀에까지 들어가게 됐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원시장은 포졸들에게 붙잡혀 홍주 관아에 끌려갔다. 관장의 갖은 .. 2014. 10. 14.
<15> 황새바위 복자 이승국·김원중 등 337명이 신앙 증거 ▲ 부활 광장에 있는 자연석 제대. 공주 나들목 교차로에서 공주 방면으로 나와 백제큰다리를 건너면 제민천과 금강의 합류 지점에 도착한다. 제민천을 거꾸로 따라 올라가다 보면 공주교육지원청 맞은편에 황새바위 성지가 있다. 황새바위 성지는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는 순교자 광장과 부활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부활 광장으로 이뤄져 있다. 성지순례를 통해 예수님 일생을 묵상할 수 있다. 성지 초입에서는 예수 성심상이 두 팔을 벌려 순례객을 맞이한다. 그 옆으로는 성지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놓여 있는데 돌은 조개 모양을 하고 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가리비 이정표를 본딴 것이다. ▲ 황새바위 성지 입구는 돌문이다. 입구가 낮아 저절로 고개가 숙여져 거룩한 마음을 갖게.. 2014. 9. 28.
<14> 예산 순교지 순교·증거 터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신앙의 얼 200년 세월 넘어 생생히 전해져 ▲ 충남 예산 지도와 순교 복자 순교지 예산하면, 충효의 고장이라는 이미지가 앞선다. 예산군 관내엔 윤봉길 의사의 애국혼이 살아 있는 충의사가 있고, 조선조 세종 시대에 살다간 이성만과 이순이라는 ‘의좋은 형제’의 전설이 전해온다. 또 비구니들이 참선 정진하는 대한불교 조계종 덕숭총림 수덕사, 조선 후기 서화가 김정희의 예술혼이 살아 숨 쉬는 추사고택도 예산에 있다. 이뿐 아니다. 예산은 내포신앙의 빛나는 요람이기도 하다.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의 생가 터가 자리한 여사울 성지도 예산에 있고, 곳곳이 순교신앙의 숨결이 살아 있는 순교 터다. 이번에 시복된 복자 124위 가운데 3위가 .. 2014. 9. 21.
<13> 홍성 홍주순교성지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일상에서 느끼는 순교자 숨결 ▲ 생매장터 근처에 조성된 야외성전에 홍주순교성지를 알리는 비석과 비문이 있다.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은 곳이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리쯤 되는 곳에 가야산이 있다. 서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도 바닷가 고을과 큰 못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는데, 바로 서해가 쑥 들어온 곳이다.…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함께 내포라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 중). 여기서 말하는 가야산 앞뒤의 열 고을은 홍주ㆍ결성ㆍ해미ㆍ서산ㆍ태안ㆍ덕산ㆍ예산ㆍ신창ㆍ면천ㆍ당진 등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설명대로 내포 지방은 지형상 바다와 가까워 곳곳에 뱃길이 발달해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내포는 외래문화를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내포 지방이 천주학을 .. 2014. 9. 7.
시복시성 의미와 절차 순교자 흘린 선혈에 후손 땀방울 더해져 복자 탄생했다 ▲ 1925년 79위 시복식이 열린 성 베드로 대성당. 79위 시복에 이어 1968년에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시복됐다. 이들 103위 복자는 1984년 서울에서 시성됐다. 16일 하느님의 종(Servus Dei)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가 시복됐다. 1925년 7월 5일에 79위가, 1968년 10월 6일 24위가 시복된 데 이어 46년 만의 시복 소식이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천상 행복을 누리는 순교자들에게는 ‘시복’이 별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교회는 시복과 시성을 통해 신자들의 성화를 돕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은총과 영광을 드러낸다. 이날 ‘박해의 심장’이던 육조거리, 현재의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시복미사를 통해 새로 탄생한 .. 2014. 8. 17.
<12> 해미 순교지 순교자 피 흘리던 박해의 땅이 교황 함께하는 신앙의 중심지로 ▲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을 앞두고 손님맞이 준비에 한창인 해미읍성의 남문인 진남루. 140여 년 만의 대반전이다. 1866년부터 7년간 이어진 병인대박해 때만 해도 숱한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죽어간 생매장터 ‘여숫골’이 해미순교성지로 성역화됐다. 해마다 10만 명이 찾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성지 여기저기에는 교황 방한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날마다 수십, 수백 명의 순례자들이 ‘신앙의 묏자리’ 해미를 찾아 순례한다. 1989년 서울세계성체대회 이후 25년 만에 방한하는 교황도 솔뫼를 거쳐 해미성지로 향한다. 우연인 듯 자신이 시복식을 주례하게 될 김진후(비오, 1739~1814) 순교자가 나고 자란 솔뫼를 거.. 2014. 8. 10.
<11> 춘천교구 포천 순교지 목마른 이에게 영원의 샘물 전한 포천의 사도 순교자 홍인 ▲ 포천 순교지 약도 포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군사도시다. 육군 제6군단 사령부와 예하부대가 주둔하고 있고, 옛 포천성당도 군 원조로 지었다. 옛 성당도 1955년 6군단장이던 이한림(가브리엘, 1921∼2012) 장군이 주도, 육군 1110야전공병단이 건립했다. 그런데 포천에서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중 홍인(레오, 1758∼1802)의 시복이 결정되면서 군사도시 포천이 춘천교구의 첫 성지가 됐다. 지난 6월 1일 자로 포천성당(주임 윤헌식 신부)이 교구 ‘전대사 지정 성당’이 된 것이다. ‘교구의 첫 성지성당’이라는 영예를 안은 포천성당에 들어서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길가에서 볼 때는 방주 형상의 특이한 성당이다 싶을 뿐인.. 2014. 8. 3.
<10> 원주 강원감영 단단한 창살도 강물처럼 흐르는 신앙을 막지 못했다 경기도ㆍ강원도ㆍ충청도ㆍ전라도ㆍ경상도ㆍ평안도ㆍ함경도ㆍ황해도. 조선 시대에는 한반도 행정구역을 8개로 나눠 조선 팔도라 칭했다. 그리고는 각 지역을 담당하기 위해 ‘감영’이라는 관아를 두었다. 즉, 감영은 지금의 도청 역할을 하던 곳이었던 셈이다. 조선왕조의 명을 따라 움직였던 감영. 1800년대 강원감영도 천주교인을 탄압하라는 명이 떨어지자 관동지방 일대 산골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을 색출해 무자비하게 잡아들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하느님의 종 124위인 김강이(시몬, 1765~1815)와 최해성(요한, 1811~1839), 최 비르지타(1783~1839)도 있었다. 강원도 원주에 인접해 있는 치악산. 산세가 험준하기로 유명한 치악산이 7월의 옷으.. 2014. 7. 27.
<9> 수원교구 양근 순교지 신앙의 뿌리 단단히 내리고 복음의 기쁨 전한 순교자의 땅 ▲ 양근성지 주임 권일수 신부가 124위 중 윤유오와 윤점혜, 권상문 등 3위가 순교한 양근천과 남한강 합수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 양평역 후문에 세운 양근 관아 터 표석. ▲ 지난 2013년 9월 양근 순교지 근처에 있는 양근섬지구에 세운 순교 기념 상징조형물. ▲ 양근 성지 내 권철신ㆍ일신 형제 흉상. ▲ 양평군 양평읍 오빈리 484-1, 일명 덕구실에 살았던 권일신이 인근 선비들과 함께 시회를 열었던 감호암. 감호암 위에는 감호정이 세워져 있었다. ▲ 2011년 5월에 세워진 양근성지 순교자 기념성당. 양근 순교지로 가는 길은 ‘꿈결 같다’. 경춘선에나 비견될 중앙선이 2007년 12월에 등장하면서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왕십리역에서 환승.. 2014. 7. 20.
<8> 여주 관아 남문 밖 순교지 불멸의 순교신심 빗돌 깊이 새긴 순교자의 땅 ▲ 지난 2006년 3월 당시 여주 순교터 추정지에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위 관계자들이 시복을 위한 현장조사를 하면서 기도를 바치고 있다. 사진제공=수원교회사연구소 여주는 우리나라 복음화 여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못자리다. 1779년 권철신(암브로시오, 1736~1801) 주도로 이뤄진 한역서학서 강학이 이뤄진 ‘주어사 터’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124위 중 5위가 피를 흘린 순교의 땅이어서다. 특히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하품리 주어사 터는 최근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 교구신도회가 천주교 강학이 이뤄진 역사의 터전으로 복원에 나서 ‘종교 간 화합의 본보기’가 될 전망이다. 시복을 앞둔 124위 중 여주 출신 순교자는 9위다.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175.. 2014. 7. 20.
<7> 남한산성순교성지 세계문화 유산 안에 살아 숨 쉬는 순교 신심 ▲ 예로부터 주요 군사적 요충지로 여겨진 남한산성은 박해시기 여러 지역 신자들이 치명한 ‘순교 터’다. 1801년 경기도 광주. 한 옹기장수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는 벌이가 될 법한 사람 많은 고을은 모두 지나쳤다. 그에게 옹기를 팔아 돈을 버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덕운(토마스, 1752~1802)이 옹기장수로 변장해 가고 있는 곳은 한양. 박해받는 교우들의 동정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한양 근처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한덕운은 근처에서 거적에 쌓인 시신을 발견했다. 동네 주민이 그에게 말했다. “홍낙민이라 하더이다. 천주를 모시다 저리됐다 들었소.” 한덕운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머리가 잘린 시신 앞에서 끓어오르는 비통.. 2014.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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