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교회 정치참여 논쟁과 분열

by 세포네 2009. 5. 4.
728x90
약자 편에서 그들 존엄성 지켜주는 것이 정의
 
김 추기경이 가톨릭의대 산업재해병원(현 평화방송 평화신문 사옥) 개원식에 참석한 육영수 여사에게 병원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1971년 11월 27일)

  1974년 10월, 지학순 주교님이 감옥에 계실 때 일이다.

  서울 혜화동 신학교에서 전국 성년(聖年)대회가 열렸는데 약 5000명이 참석했다.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님은 강론에서 유신정권을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입각한 신자 의무에 대해 역설하셨다.

  성년대회는 이내 유신정권 규탄시위로 변했다. 주교단은 주교관을 쓴 채 시위대 맨 앞에서 거리 진출을 시도했다. 신부들과 신자들은 '지주교를 석방하라', '헌정질서 회복하라'는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뒤따랐다.

   난 그때 회의차 로마에 체류했는데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는 사진이 헤럴드 트리뷴지(紙)에 실렸다.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담당 주교는 그 사진을 보고 "왜 주교들까지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하느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내가 한마디 했다.

   "주교들이 왜 거리에 나오느냐고 묻기 전에 도대체 상황이 어느 정도로 악화됐길래 주교들까지 거리에 나와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한국에 인권과 정의는 없습니다."

   하기는 한국교회 안에도 이같은 모습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그 무렵 출범한 정의구현사제단(이하 정구사)에 대한 입장은 주교회의에서도 찬반으로 갈렸다. 보수적 성향의 연장(年長) 신부들은 구국사제단을 결성하고 정의구현사제단에 대한 우려를 쏟아냈다. 가톨릭시보사는 보수, 진보세력을 대변하는 두 신부의 논쟁을 게재하고, 광주 대건신학대 학생회는 시국에 대한 분명한 태도 표명을 주교단에 요구하기까지 했다.

   논란의 핵심은 교회의 정치 개입이 정당한가, 아니면 분열을 조장하는 이탈행위인가 하는 점이었다.

   일부에서는 "김 추기경이 정구사 신부들을 조종한다"면서 분열과 갈등을 초래한 장본인으로 나를 지목했다. 그리고 정부와 함께 나를 모함하는 탄원서를 만들어 그걸 교황청에 보냈다. 이 기회에 김 추기경을 '끌어내려야'한다고 분위기를 몰아가는 세력이 있었다.

   참으로 가슴 아팠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해명을 할 사안도 아니었다. 억울한 심정을 털어놓을 데는 하느님밖에 없었다. 허구한 날 십자가 앞에 서면 "하느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일전에 밝혔지만, 교회의 현실참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기초한다. 교회는 세상 안에, 세상을 위해서, 즉 인류 구원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에 열려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군사독재정권의 반민주적 정치에 저항하고, 가난과 고통에 신음하는 인간 문제에 개입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현대세계의 사목헌장'이 천명하듯 '인간은 구원되고 인간사회는 쇄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내가 정구사 신부들을 조종하고, 정구사 신부들은 내 승인을 받아 움직인다고 수군거렸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피가 끓는 젊은 신부들의 기를 꺾지 않으려고 힘이 되어주기는 했으나 '조종'이란 표현은 어불성설이다. 당시 정구사 신부들은 나한테 "왜 내 말을 안듣고 자꾸 이러느냐"는 야단을 많이 맞았다.

    내가 그들의 비판적 시각을 꾸짖으면서 "그런 시각이라면 자네들이 교회를 비판하는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난 후부터는 정구사와 일정 거리를 두고 살았다.

   난 70, 80년대 격동기를 헤쳐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 더욱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고 했을 따름이다. 그것이 가난하고 병들고 죄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시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십자가 제단에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86년 6.10항쟁 때도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그런 믿음 하나로 막았다.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불가(佛家)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말한다. 당시 비판과 분열, 긴장감에 괴로울 때는 그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일시적 충동이지만 환속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때부터 잠을 제대로 못 이루는 병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30년 불치병'이다. 처음에 어느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몇 달 동안 먹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게 습관성이 되었다. 그 약을 끊고 다른 약으로 서너번 대체하기는 했으나 지금도 신경안정제 성분이 든 약에 의지에 잠을 청한다. 가끔 수면제를 써야 할 때도 있다. 서울대교구장직에서 은퇴한 지 6년이 되어 가는데도 그 병은 낫지를 않는다.

    그해(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조총련계 문세광이 쏜 흉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민들은 충격과 비통에 휩싸였다. 육 여사가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뭔가 간절한 의욕이 솟아났다.

   그날 8.15 경축 연회장에서 만난 김종필(현 자민련 총재) 국무총리에게 "육 여사한테 대세(代洗)를 줄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 총리는 상황을 알아보고 돌아와서 "수술 중이라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육 여사는 그날 저녁 7시에 운명하셨다.

    그때 대세를 생각한 이유는 육 여사가 '청와대 제1야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박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면서 약자 편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김재규씨에게 전해들은 얘기지만 육 여사는 박 대통령에게 민심을 전달하면서 귀에 거슬리는 충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공인의 아내로서 부덕(婦德)을 잃지 않았으며 사회의 그늘진 곳도 자주 찾아다녔다. 국모(國母)다운 면이 많은 훌륭한 영부인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육 여사가 그때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박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은 한결 부드러웠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심리적 의지처를 잃은 박 대통령의 고독감이 정치에 어느 정도 악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육 여사는 국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면서 남편의 통치 스타일을 슬기롭게 누그러뜨렸을 분이시다.

    당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인상 깊은 젊은이가 한명 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