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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한달 동안의 피정

by 세포네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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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당신 것이오니 그대로 당신께 맡깁니다.."

 

"나는 그리스도처럼 가난한 자 되고 싶다. 가난한 자 중에서도 가난한 자. 모든 사람의 종이 될 수 있을 만큼 가난한 자…" 1979년 1월 한달 피정 중에 남긴 김 추기경 육필 원고.

 수도자 피정을 지도하기 위해 일본에서 가끔 방한하는 에반젤리스타 신부(예수회)는 70년대 중반부터 나를 볼 때마다 한달 피정을 권유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미뤄놓고 한달이나 자리를 비우는 게 부담스러워 대답을 못하다가 79년 1월 큰 맘 먹고 수원에 있는 말씀의 집에 들어갔다.

 난 그때 영적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평온한 얼굴로 영성적 얘기를 하면서도 스스로는 기도에 침잠(沈潛)하기 힘들 정도로 영적 빈곤에 시달렸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파는 심정으로 피정에 들어갔다.

 피정지도를 맡은 에반젤리스타 신부의 강론시간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기도시간으로 주어졌다. 오전, 오후 두시간씩 하루 너댓시간 기도하기로 마음 먹고 생활했는데 어떤 날은 그나마도 채우기 힘들 정도로 하루가 후딱 지나갔다. 그날 복음과 강론을 내 것으로 소화하기 위해 성서 구절을 찾아 음미해보고, 기도 중에 분심이 들어 밖에 나가 서성거리다 보면 기도시간이 부족하곤 했다. 처음 며칠간은 기도 중에 분심이 들어 몸부림치듯 괴로워했다.
 "…여러 잡념 속에 기도는 여전히 답보상태다. 어떻게 기도하면 좋을지 가르쳐 달라고 성령께 빌었다. 무릎을 꿇었다가 앉았다가, 독백으로 예수님께 이야기했다가, 무슨 말씀이든지 마음 속 깊이라도 들리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기다려보았다가, 편한 자세로 앉아 보았다가…"(1월18일 피정일기 중에서).
 주님 앞에서 여전히 자아에 집착하는 죄와 어리석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정 기간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나는 정말 그분을 아는가?'라는 것이었다. 다른 묵상 주제를 갖고 앉아 있어도 이상하게 그 질문으로 옮겨갔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 그것은 내 생명과 구원이 달린 절체절명의 문제다. 먹고 사는 문제나 추기경 직위 같은 건 사실 부차적이다. 
   그런데 그런 본질적 문제를 소홀히 하고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뛰어다니기만 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닮아 그분과 함께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고 싶었다.
 사도 바오로가 천주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장면을 묵상할 때였다. 주님께서 나의 위선을 호되게 꾸짖는 것만 같았다.
 "스테파노야, 스테파노야. 내 피로써 너를 씻겨 주었는데 너는 오히려 죄로 더렵혔다. 내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 사울의 박해보다 못할 줄 아느냐? 사울은 나를 모르고 박해했다. 그런데 그에게는 진실이 있었다. 너는 진실보다는 거짓과 위선이 더 많지 않느냐?"
 1라운드는 완전 KO패였다. 두렵고 불안했다. 지도신부는 "그 불안도 결국 자아를 믿고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려는 생각이 숨어 있기 때문에 생긴다"고 조언해 주었다.
 주님을 알려면 그분의 행적과 말씀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분의 삶에 대해 묵상하고 기도하는 데 전념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지도신부 강론 중에 미심쩍은 대목이 있어 '성서사상사전'에서 '하느님 사랑'을 찾아보았다. 성령만이 하느님 사랑을 깊이 깨닫게 해준다는 대목이 눈에 띄었다. 
   성당에 다시 들어가 기도했다. "성령이여, 저를 밝혀 주소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비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하느님 사랑을 깨닫게 해주소서"라며 애원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러시아혁명 당시 20대 젊은 여성이 아이 딸린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대신 총살당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도 "벗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복음을 실천하느라 유다인 수용소에서 죽음을 자청하지 않았는가.
 피정 3주째 접어들었다. 하느님이 내 존재의 바탕이며, 그리스도께서는 내 존재의 내적 핵(核)임을 깨닫기 위해 기도에 열중했다. 그런데 기도는 여전히 어려웠다.
 주일 아침에 동네 이발소엘 다녀왔다. 서민들이 이용하는 싸구려 이발소였다. 이발소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숙소에 들어서면서 '아까 만난 사람들이 내가 이런 큰 방에 사는 줄 알면 놀랄 걸….'이라는 우월감이 문득 들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내 신분, 환경, 받는 대접이 무의식 중에 나를 '귀하신 몸'으로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일종의 귀족의식이 나도 모르게 몸에 뱄다. 어제 저녁기도에서 "그리스도 당신처럼 모든 사람의 종이 될만큼 가난한 자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 얼마나 엄청난 모순인가.
 나는 가난한 집 출신이다. 여러해 동안 남의 집 셋방에서 살았다. 그런데 신부가 되면서 가난을 점점 잊어버리더니 주교, 대주교, 추기경으로 올라가면서 불행하게도 귀족이 되어 버렸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당신을 낮추신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은 겸손이다. 그걸 먼저 깨달아야 했다.

 "주여,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주님께 대한 저의 사랑도 재지 않겠습니다. 그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저를 받아주소서. 모든 것이 당신 것이오니 있는 그대로 당신께 맡깁니다…"(2월 13일 피정 마지막 날 일기).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하느님 사랑을 부어 주셨다"(로마 5,5)라는 성구를 가슴에 안고 피정의 집에서 나왔다.  
 며칠 후 이번에는 내가 사제수품 예정자 피정을 일주일간 지도했다. 내 강론이 유난히 뜨겁고 힘이 넘쳤던 모양이다. 옆에서 피정지도를 돕던 최창무 신부(현 광주대교구장)와 이한택 신부(서울대교구 보좌주교)는 "한달 피정에서 받아온 은혜를 여기서 다 쏟아내는 것 같다"는 얘기를 몇번이나 했다.

 사실 지도신부의 기대만큼 깊은 영적체험에는 이르지 못한 한달 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 무렵 성령세미나에 참석한 일이 있다. 성령께 눈물의 은사를 청했다. 다른 은사는 몰라도 눈물의 은사만큼은 꼭 얻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잘못을 뉘우치면서 통절히 운 것처럼 울고 싶었다. 나도 주님 앞에 나가 죄를 뉘우치면서 펑펑 울고 싶었다.

 성령세미나 중에 눈물이 조금 흐르기는 했으나 베드로처럼 심연 깊은 곳에서 나오는 통한의 눈물을 쏟지는 못했다. 지도신부들이 세미나를 마무리하면
서 내게 한 말씀 해달라고 부탁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분을 옆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토록 청한 눈물의 은사를 얻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혹시 세미나에서 은사를 얻지 못해 낙담하는 사람이 있거든 '추기경도 못받고 돌아갔다'고 위로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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