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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신군부 세력과 5.18 광주(하)

by 세포네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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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통스러웠던 70-80년대 광주의 5

 

광주 항쟁에 적극 가담한 사형수들의 구명을 위해서는 전두환 대통령의 마음을 돌려놓는 게 급선무였다. 사진은 청와대에서 윤공희 대주교님(오른쪽)과 함께 전 대통령을 만나고 있는 장면.

 광주에서 계엄군과 시위대의 충돌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혈사태는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녀 보았지만 소득이 없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만나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국민 대부분은 정부 발표와 언론 보도대로 불순세력이 선동한 소요쯤으로 알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을 달래가면서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님께 편지를 썼다. 혹시 도움이 될지 몰라 그 안에 돈도 좀 넣었다. 광주는 이미 외부와 완전 차단된 상태였는데 이 계엄사령관 협조를 구해 군종신부 편으로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편지에 "광주의 진실을 알려야 합니다. 따라서 진실이 필요합니다"라고 썼다.

 윤 대주교님한테서 짧은 답장이 왔다. "옳은 말씀입니다. 광주의 진실이 필요한 게 지금 '진실'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옹, 재야논객 천관우씨 등과 함께 광주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시국성명을 발표했다. 군부를 자극하면 안 된다는 의견이 우세해 광주 문제를 완곡하게 언급했는데 그나마도 동아일보 단신을 제외하고는 어느 신문 방송도 성명 내용을 보도하지 못했다. 계엄사령부 장교들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신문사 편집국에 상주하면서 기사를 일일이 검열하던 시절이었다.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무력 진압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혔다. 6·25 사변 이후 최대 민족적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참으로 비통했다. 신군부 만행에 울분을 느꼈다.

 난 본의 아니게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 20여년 중에서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광주의 5월'이라고 말한다. 광주에 내려가 시민들과 함께 피를 흘리며 싸웠더라면 그토록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으로 말하자면 현장에 계셨던 윤 대주교님의 그것이 훨씬 더 컸을 것이다. 더구나 윤 대주교님처럼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이 투철하신 분이 그 고통과 울분을 삼키셨을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자신의 양떼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참극을 속수무책으로 보고 있어야 하는 목자의 고통을 어느 누가 헤아리겠는가.

 5월26일로 기억한다.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도청에 모여 있는 시민군을 무력진압하고 작전을 종료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김성용 신부와 평신도 2명이 용케 광주에서 빠져나와 내게 광주항쟁 상황일지를 전해 주었다. 가슴을 쥐어 뜯으면서 울부짖어도 시원잖을 사실이 많이 열거돼 있었다.

 김 신부에게 부탁했다.  

 "나중에 사실 그대로 증언하십시오. 흥분하거나 과장하면 절대 안 됩니다. 이 불행한 사태를 국민에게 올바로 알리려면 진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그런 부탁을 한 이유는 내용이 상당히 부풀려진 유인물이 이미 나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감정에 호소하느라 사실을 과장한 내용이 훗날 거짓으로 드러나면 광주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민들이 '서울의 봄'을 환호할 때 어느 누구보다 변화의 물결을 반긴 사람이 나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도 기대려니와 이제 강론대에서, 시국기도회에서 정치 얘기를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깨지고 말았다.

 당시 가톨릭대학생회 등 젊은층에서는 내가 사태 전면에 나서서 강력하게 대처해 주길 촉구했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아니, 광주로 내려가 몸으로라도 계엄군을 막고 싶었다. 혼자서라도 강경한 항의성명을 내려고 쓰고 찢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신문방송에서 보도해 주지 않으면 유인물을 찍어서라도 항의하려고 했다.

 그러나 진실이 가려져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성난 젊은이들을 불행으로 내몰 가능성이 컸다. 그건 마른 풀섶에 불을 던지는 꼴이다. 만일 젊은층 요구대로 내가 자극적 표현을 써가면서 신군부를 연일 비판했더라면 유혈사태는 서울까지 번졌을지도 모른다.

 누가 나에게 "그때 최선을 다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럼 아무 것도 안 했느냐"고 되물으면 "아니다. 나름대로 사태를 막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하고 싶다.

 광주는 빠른 속도로 질서를 회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신정권 시절처럼 물리적 힘으로 유지되는 질서였다. 안충석 신부, 장덕필 신부 등 신부 10여명이 광주의 진실을 알리다 붙잡혀 들어갔다. 정부 당국은 그들을 허위사실 유포죄로 몰아가기에 바빴다. '광주 시민의 아픔에 동참하며'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시국 담화(7월 22일)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힘은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며, 기도는 세상 어떤 무력보다 강하다"면서 신자들에게 기도를 당부했다.

 어두운 터널같은 그 순간에도 기쁜 일이 있었다. 광주 항쟁 가담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3명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였는데 다행히 3명 모두 감형되거나 석방되었다. 사형수 부인들은 처음에 내 집무실을 무작정 점거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남편 생사를 내가 손에 쥔 것도 아닌데 부인들이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암담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여러 경로로 접촉했다. 윤 대주교님과 군종교구 정명조 신부(현 부산교구장)가 애를 상당히 많이 쓰셨다. 사흘 만에 남편의 감형과 석방 소식을 들은 부인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기쁜 소식이 들려온 날 저녁, 명동본당에서 마련해준 광주행 버스에 오르던 부인들의 환한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광주에 내려가면 그때 용감하게(?) 집무실로 쳐들어왔던 부인들이 가끔 찾아오곤 했다.

 광주의 아픔이 잊혀지려면 적어도 1세기는 걸릴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광주의 5월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너무나 깊은 상처를 남겼다. 희생자들의 민주화 공로가 뒤늦게나마 인정된 것은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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