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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유신정권과 지학순 주교 사건(3)

by 세포네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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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 사건 관련 젊은이들 감형조치까지 요청
 
1975년 2월15일 출감하는 지학순 주교를 모시고 나오는 김 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왼쪽).

 박 대통령은 지학순 주교님을 풀어달라는 내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알겠습니다. 오늘 밤에 풀어드리겠습니다"하고 시원스레 대답했다.

 내 말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정 부분 수긍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내친 김에 한가지 더 요청했다.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젊은이들이 비상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들을 죽이면 안 됩니다. 국민과 국제사회의 비난이 빗발칠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시오. 그러면 국민의 존경심도 한층 커질 것입니다."

 "…그건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정말 다행이었다. 며칠후 국방부장관 이름으로 감형조치가 내려졌다. 유인태 현 청와대 정무수석, 이철 전의원, 이강철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 등이 그때 목숨을 건졌다.

 명동성당으로 돌아온 나는 밤 10시쯤 전화연락을 받고 중앙정보부로 달려가서 주교님 신병을 인수했다. 그리고 주교님을 모시고 명동성당 철야기도회장에 가서 신부와 수녀들의 기도에 감사 뜻을 표시했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밤이었다.

 주교님은 명동성당 뒤 샬트르 성바오로수녀원으로 주거가 제한된 가석방 상태였다. 며칠 뒤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군법회의 출두 관계로 주교님을 모시고 갔다. 그런데 그들이 몇시간 후에 다시 모시고 오겠다고 약속한 주교님이 또 행방불명되었다.

 얼마 만에 주교님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정보부 요원들이 자신을 후암동 동생 집에 가택연금시켰다면서 어떻게든 손을 써달라고 부탁하셨다. 당시 주교님은 당뇨병이 있어서 병원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다시 중앙정보부측과 협상해 주교님을 성모병원(현 명동 가톨릭회관)으로 모셔왔다. 감시요원 2명이 병실까지 따라 들어오길래 내가 항의했더니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따라 붙으라는 엄명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런데 사태가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주교님께서 죽음을 각오하고 독재권력과 싸우겠다는 결의를 굽히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날 양심선언 얘기를 꺼내셨다.

 "내가 젊은이들에게 돈을 대서 내란을 선동하고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내가 빨갱이입니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양심선언을 해서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주교님, 그건 안 됩니다. 건강도 안 좋은 상태인 데다 사태를 악화시킬 뿐입니다. 만일 주교님께서 그런 선택을 하시면 구속은 물론이고 교회 여론까지 분열됩니다. 그러면 사태를 수습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속이 탈 노릇이었다. 주교님을 설득시켜 놓으면 밤 사이에 누가와서 마음을 바꿔 놓았는지 이튿날 그 얘기를 다시 꺼내셨다. 주교님은 고민하고 계셨다. 민청학련 구속자 가족들이 찾아와 구명운동 차원에서 진실을 밝혀달라고 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목숨을 구하려면 당신 자신이 똑같은 죄목으로 감옥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주교님과 며칠 줄다리기를 하다 결국 내가 손을 들었다.  

 "주교님 양심대로 하십시오. 저쪽(중앙정보부)이야 브레인들이 있어 대응방법을 다 세워 놓았겠지만 우리야 가진 거라곤 양심밖에 없지 않습니까."

 주교님은 군법회의 출두 당일 양심선언을 하고 곧장 감옥으로 걸어 들어가겠다고 말씀하셨다. 양심선언 전날 밤이었다. 내일이면 영어(囹圄)의 몸이 되실 주교님을 뵙기 위해 병실에 갔는데 군인이 병실에 쪽지를 던져놓고 막 나갔다. 내일 공판이 연기됐다는 통보서였다.

   천만다행이었다. 주교님께 양심선언 계획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라고 말씀드렸더니 "벌써 자료를 만들어 놓고 외신에도 다 귀띔해 놓았는데…."라며 난색을 보이셨다. 주교님은 내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결국 내 말에 따르기로 하셨다. 그래서 '당장 내일은 별 일 없겠구나'라고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윤공희 대주교님이 올라오셨다. 윤 대주교님께 양심선언 건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오늘을 별 일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누군가 들어오더니 "지 주교님이 병원 마당에서 뭘 하고 계십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뭘 하다니?

 급히 뛰어 나가보았다. 지 주교님은 전세버스로 상경한 원주교구 신자들과
묵주기도를 바친 후 내외신 기자들에게 양심선언문을 나눠주고 그걸 낭독하고 계셨다.

 "본인은 양심과 하느님의 정의가 허용치 않음으로 비상군법회의 소환에 불응한다. 유신헌법은 민주 헌정을 파괴하고 국민 의도와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된다…."

 이 양심선언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주교님은 물론 양심선언문 타자를 쳐준 서정렬 수녀, 영문 번역한 임광규 변호사, 현장에서 주교님 체포를 저지한 신부들이 줄줄이 연행됐다. 우려한 대로 주교님은 8월12일 3차 공판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주교회의는 지 주교님 고통에 동참하기로 뜻을 모으고 사태의 진실을 알리는 해명서를 전국 본당에 배포했다. 각 교구에서는 시국기도회를 열어 유신정권 탄압을 규탄했다. 시국기도회가 서울, 원주, 광주, 인천, 대구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특히 피가 끓는 젊은 사제들은 타교구 시국기도회까지 참석하는 열성을 보였다.

 사실 난 젊은 신부들이 자꾸 시국기도회를 여는 것을 말리는 편이었다. 정부를 자극하면 할수록 우리 선택폭이 좁아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회 주례를 부탁하러 온 신부들을 야단쳐서 돌려보낸 적도 있다. 그러나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은 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지 주교님은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1975년) 2월15일 석방되셨다. 그 사건을 겪는 동안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교회분열이었다.

 젊은 신부들은 지 주교님 사건에 대한 조직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보고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9월26일 시국선언을 하고 명동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사제들이 주도한 최초의 가두시위였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하는 연장(年長) 신부들은 반대편에서 '구국사제단'을 만들어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교회가 이념논쟁에 휘말리는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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