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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101

[16] 로마제국의 박해 300년 박해 순교신심으로 극복 처음 로마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놀라움과 반감이 아닐까 싶다. 4대성당을 비롯해 곳곳에 산재해 있는 교회 유적들의 엄청난 규모와 화려함은 이를 건축한 신앙인들의 놀라운 신앙열정을 체험케하면서도 왠지 이질감 내지는 노예문화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함께 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의구심은 카타콤바를 순례하면서 사그라지게 될 것이다. 지상의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는 참혹한 환경 속에서 살다 스러져간 지하교회 순교자들의 신앙이라는 튼튼한 기초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는 느낌, 아니 이들의 순교가 있었기에 지상교회의 영광이 가능했으리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과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떼르뚤리아누스의 『순교자의 피는 .. 2005. 7. 3.
[15] 초세기 교회의 이단과 분열 역사적 사건에는 언제나 양면성이 존재한다. 어떤 좋은 것이라도 나쁜 점을 가지고 있고 반대로 나쁜 것이라 해도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복음선포는 어차피 복음의 고유한 문화와는 다른 이질적 문화를 대상으로 삼아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복음선교는 일종의 토착화 단계를 거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종교혼합 내지는 문화갈등 현상을 빚게되고 따라서 복음선포는 정통신앙과는 다른 분열과 이단이라는 자연발생적인 부정적 요소를 안게된다. 따라서 복음선포와 함께 다양한 문화들 속에서 복음의 고유한 성격을 유지토록 하면서 그 문화들을 쇄신시키는 한편 그 문화들이 가진 장점들을 흡수 동화하여 교회 스스로도 쇄신되는 것이 초세기 교회의 과제이기도 했다. 이러한 신앙교의를 구체화하는 과정 속에서 도출되는 오류, 즉 이단들.. 2005. 6. 30.
[14]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 초대교회 당시에는 로마와 더불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가장 큰 국제적인 도시였다. 이중에서 알렉산드리아(현지명=알리스칸드리아)는 기원전 331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자기 이름을 따서 나일강 하구와 지중해가 만나는 곳에 세운 도시로 지금도 수도 카이로 다음가는 제2의 도시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이집트 프톨레마이이오스 왕가의 수도가 됐으며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세대륙이 만나는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헬레니즘 시대의 문화·경제의 중심도시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왕 클레오파트라의 고향이기도 한 알렉산드리아에는 지난 96년부터 이집트 정부와 유네스코가 복원을 추진 중인 70만개의 파피루스 뭉치를 소장한 고대 세계 최대의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일찍부터 문화와 학문이 꽃 피웠.. 2005. 6. 30.
[13] 교부들의 황금기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남동쪽으로 약 280㎞, 차로 4시간을 달리면 가빠도기아라고 하는 고원지대가 나타난다. 이 곳은 주후 17년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의 속주가 된 가빠도기아 왕국이 있던 곳이다. 가빠도기아 곳곳에는 3천개가 넘는 동굴 성당이 있어 이 지역을 찾는 순례객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수도원 집성촌인 괴레메 지역이 가장 유명하다. ‘너희가 찾지 못하는 곳’이란 뜻의 괴레메의 바위산들에는 수많은 동굴성당과 수도원이 조성돼있는데 안내자의 말에 따르면 매일 한 성당에서 1번씩 돌아가며 1년간 미사를 봉헌 할 수 있도록 365개의 성당이 조성 돼 있다고 한다. 이 동굴성당의 내부 벽에는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주듯 마모되고 이교들에 의해 훼손되기도 했지만 수도자들이 불타는.. 2005. 6. 30.
[12] 초기 그리스도교 호교가 호교교부 시대의 상황 교회사의 시계추가 2세기 중반에 이르면 성공적인 선교활동으로 교회 공동체가 날로 성장한다. 그러나 교회의 성장은 새로운 문화권, 이질적 세상과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로마 제국의 박해도 갈수록 심화된다. 다신교 국가인 로마제국에서 하느님만이 유일신으로 다른 신들은 우상에 불과하다는 그리스도교의 사상은 이교도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됐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황제 신격화를 거부해 반정부 집단으로 취급됐다. 또한 급격한 교세의 확장에 놀란 로마제국은 체제에 대한 불안과 위협을 느낀 나머지 마르쿠그 아우렐리우스 황제같은 권력자나 첼수스 및 루치아누스 같은 지식층이 그리스도교를 반박하고 지속적으로 박해하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외에도 교회 구성원 대부분이 하층 계급으로 구성돼 있어 저질.. 2005. 6. 30.
[11] 사도시대의 교부들 100여명 밖에 들어 갈 수 없는 작은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미사를 봉헌하는 내내 언어의 장벽을 뚫고 전해져오는 같은 신앙고백에 '하나의 신앙 안에 한 형제' 임을 체험하며 몸서리 쳤다. 이처럼 우리 교회의 신앙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다. 그곳이 비록 아프리카 어떤 오지라 할지라도. 시간적으로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지도 어느듯 2000년. 그 긴 오랜 세월 동안 무엇이 '하나의 신앙'으로 이어 내려오게 하는지. 그 힘은 무엇인지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초기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의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은 언제나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또는 '우리가 전해들은 바에 따라'였다. 주후 100년 경의 교회는 사도들의 수가 순교로 적어지자 그 제자들이.. 2005. 6. 30.
[10] 교계제도의 기원 교회의 초창기 역사를 따라 순례하다 보면 유명한 도시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 도시와 연관한 인물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스미르나의 뽈리까르푸스, 가이사리아의 바실리우스 등. 이들은 모두 그 도시의 주교들이었으며 도시의 유명인물들은 대개 교회의 정통성과 선교를 위해 헌신한 주교들이었다. 생각이 여기쯤 미치면 자연히 주교, 신부, 부제로 이루어지는 교계제도가 언제부터 형성됐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교계제도란 교회 초창기에는 성령의 은총이 많은 사람들의 특수한 활동을 통하여 드러났는데 교회 안에서 이러한 직무를 수행한 사람들 중에는 사도, 예언자, 전도사, 목자, 교사, 기적을 행하는 사람, 병을 고치는 사람,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 희사하는 사람등이 있었다. 이 여러 직.. 2005. 6. 29.
[9] 베드로, 바오로의 순교 로마의 4대 성당이라고 하면 성 베드로 대성전, 성 요한 라떼라노 대성전, 성모 마리아 대성전, 그리고 성 바오로 대성전을 일컫는다. 그중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성전은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전들이다. 인류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창조물의 하나를 건축물에서 꼽는다면 단연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이라 할 수 있다. 최대길이 221m, 최고 높이 141m로 세계 최대의 성당 가운데 하나이며 독창적인 구상과 미켈란젤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관을 상징해 제작한 돔은 베드로 대성전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다. 교황은 모든 중요한 바티칸의 행사들을 이 위대한 성전에서 거행하며 순례자들이 많을 때에는 성전 앞의 타원형 광장에서 옥외행사를 집전한다. 얼마전 막을 내린 대희년도 바로 베드로.. 2005. 6. 29.
[8] 로마교회의 기원 로마를 처음 방문한 순례자들이 받는 감흥은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도시 전체가 웅장한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난 유물과 유적, 빼어난 예술 작품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것은 가톨릭 신앙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이요, 전세계 가톨릭 신앙의 심장부에 서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다른 또 하나의 반응은 신앙이 소박해야 한다는 어렴풋한 신념에서 나오는 "조금 과하지 않은가?" 하는 푸념이다. 하늘을 찌르는 웅장한 성당과 조각품들은 신앙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가난한 이들의 교회와는 거리가 먼 듯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로마에서 오래 거주한 한 한국인 교포는 "건물의 웅장함이나 화려함에 매혹될 필요도 불평할 필요도 .. 2005. 6. 29.
[7] 바오로 사도의 전도여행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공동체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기 시작했고 흩어진 신자들은 이교도 지역에서 용감하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성교회가 창립돼 '그리스도의 사람들' 즉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만큼 독립된 종교단체로 주목을 끌었다. 이에 사도들은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에 파견해 교회를 돌보게 했고 바르나바는 다르소에 머물던 바오로를 초빙하고 이때부터 사도 바오로의 위대한 전도여정이 시작된다. 사도 바오로의 위대성은 그의 전도여행에 있고 그 전도여행의 위대함은 구원의 복음이 유태교나 팔레스티나지역의 좁은 곳을 벗어나 전 세상을 위한 보편적 복음이 되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데 있다. 바오로는 안티오키아를 거점으로 세번에 걸쳐 지.. 2005. 6. 29.
[6] 예루살렘 사도회의 "율법 보다 믿은 이 우선" 확인 사도 바오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열심한 전교로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이들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들 중에는 유다인 신자들뿐만 아니라 외교인(이방인)들도 많았다. 문제는 여기에서 비롯됐다. 율법을 강조하는 유다인 신자들과 그렇지 않은 외교인들 사이에서 뜻하지 않은 심각한 갈등이 생겨 자칫 교회가 분열될 지경에까지 이르게 할지도 모를 중요한 문제가 불거지게 된다. 바로 '할례' 문제였다. 첫 선교여행을 마치고 안티오키아 교회로 돌아온 바울로에게는 선교여행을 무사히 그리고 좋은 성과를 얻었다는 기쁨을 만끽하고 추가하기보다 골치 아픈 문제에 당면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의 내부적인 갈등을 최초로 목격하게 된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사도행전 15,.. 2005. 6. 29.
[5] 사울의 개종 (위) 다마스커스 크리스찬 구역에 위치한 아나니아 교회. 오랜 역사를 간직한 작은 지하교회로 바오로 사도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아래) 다마스커스 '곧은 거리'의 현재 모습. 성서는 사울이 회심 체험 후 이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서 아나니아로부터 안수와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적인 생각과판단을 뛰어넘는다. 때론 너무 극적이어서 두려움 마저 느끼게 한다. 스테파노가 디아스포라 유다인들과의 논쟁 끝에 유다 의회 의원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던 그 현장에서, 사울은 스테파노를 돌로 내려치는 거짓 증인들의 옷을 받아들고 스테파노의 순교를 목도하며 그의 죽음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사울은 집집마다 다니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신도들을 가려내 모두 감.. 2005.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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